라디오방송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기획] 라디오방송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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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방송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라디오방송의 시작
1920년 10월 16일 미국의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사는 연방정부 상무성에 방송국 설립 허가 신청서를 제출하고 10월 27일 KDKA라는 호출부호로 출력 100W의 방송국 설치 허가를 받았다. 때마침 제29대 대통령 선거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선거 결과를 알려주기 위해 서둘러 11월 2일 첫 방송을 시작했다. 이 방송을 진행한 KDKA 스튜디오는 펜실베니아주 피츠버크 웨스팅하우스사 빌딩 옥상에 마련된 텐트일 뿐이었고 청취자는 500명~1,000명에 불과했지만, 활자가 아닌 무선 전파를 통해 뉴스를 전달한 세계 최초의 라디오방송이었다.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인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 경성방송국은 출력 1kW, 주파수 690kHz, 호출부호 JODK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라디오 전파를 발사했다. 그리고 1961년 12월 KBS TV가 개국할 때까지 라디오는 사실상 유일한 방송 매체로 우리 삶의 일부가 됐다.

광복의 소리
경성방송국은 일제강점이라는 비극적 환경 속에 사실상 일제의 홍보 기관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 최초의 방송이라고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에 따라 우리의 방송 주권을 회복한 9월 3일을 방송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지만, 1927년 우리나라 영토에서 최초로 전파가 발사됐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방송국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일제의 압박에도 민족의식과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1942년 12월에 있었던 ‘단파방송 청취 사건’이다.

일제는 태평양 전쟁 발발과 함께 ‘외국 단파방송 청취 금지령’을 공포하고 시민들의 고급 수신기를 압수할 정도로 방송 전파를 강력하게 통제했다. 그러나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던 성기석, 이이덕 등 한국인 기술직원들이 중경방송국에서 임시 정부가 보내는 한국어 방송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신하는 ‘미국의 소리’를 몰래 듣고 있었고, 밀청자 수가 차츰 늘어나다가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경성방송국 안에서만 아나운서, 편성원, 기술직원 등 약 40명이 체포됐고 각 지방 방송국까지 합치면 150명에 가까운 한국인 방송인들이 검거됐다. 방송인이 아닌 이들까지 더하면 300여 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돼 수난을 당했으며,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75명에 달했다. 그중에는 옥에서 운명을 달리한 이들도 6명 있었다.

이들의 희생 정신을 기념하며 1991년 KBS 한 켠에는 ‘물망비(勿忘碑)’가 새워졌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를 통해 황복을 선언하는 일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디오의 전성시대
1960년대는 라디오의 전성시대였다. 1961년 한국문화방송주식회사, 지금의 MBC가 개국하면서 불과 3년 만에 대구, 광주, 대전, 전주 등 4개의 직영 지방국을 개국했으며, 동아방송(DBS), 동양방송(TBC) 등 민간 방송이 모두 60년대에 개국한 것이다. 1961년 KBS를 시작으로 TV 방송을 시작했지만, 60년대 말까지도 TV 수상기의 보급은 50만 대에 머무른 반면 라디오는 1961년 말 100만 대를 돌파해 가장 주요한 매체로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TV 시대의 도래
라디오의 명성이 빛이 바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TV 시대가 시작하면서다. TV에게 1위 자리를 내어준 라디오는 이후 등장한 PC와 스마트폰 등에 밀려 점점 입지를 잃었다. 그리고 최근 방송통신위원회가 발표한 ‘2016 방송매체 이용행태 조사’에 따르면 TV(95.7%), 스마트폰(83.3%), PC/노트북(55.5%)에 이어 라디오는 4위로 27.8%의 매체 이용률을 보였다. 특히, 연령별 이용 빈도에서 20대의 82.8%, 10대의 90.8%가 ‘전혀 안 봄/이용 안 함’이라고 응답해 라디오의 미래가 쉽지 않을 것을 보여줬다.

라디오의 지금
2006년 라디오방송을 라디오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을 이용해 PC로도 들을 수 있게 됐다. KBS의 ‘콩’, MBC의 ‘mini’, SBS의 ‘고릴라’ 등 인터넷 라디오방송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플랫폼의 변화는 ‘보이는 라디오’라는 신개념 라디오를 선보였으며 시청자 사연 역시 엽서, 팩스에서 문자, 인터넷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근에는 PC뿐만 아니라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모바일로도 이용할 수 있다.

라디오의 재도약
지난 경주 지진 당시, 국민 메신저로 불리는 ‘카카오톡’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불통이 됐다. 이 상황은 지진이라는 손 쓸 길 없는 사태에 일상의 일부를 마비시키면서 국민의 불안감을 증식시켰으며, 그토록 의지했던 스마트폰이 정작 가장 의지해야 할 긴급 상황에 무용지물임을 드러냈다. 이때 주목 받은 것이 바로 라디오다. 스마트폰으로 직접 수신하는 라디오, ‘하이브리드 라디오’는 스트리밍 라디오와 달리 데이터 부담이 없고, 스트리밍 라디오보다 3~7배 배터리를 오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스마트폰에 내장돼 있는 라디오 수신 칩을 활성화해 직접 수신을 의무화하는 방안이 활발히 논의됐다. 한때는 생존 여부마저 불투명하다고 점쳐지던 라디오지만, 인류의 마지막 미디어 수단으로서 라디오의 역사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