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을 위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국정원을 위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785

국정원을 위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 지금도 오남용 많은 감청, 통제장치 없이 확대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당신의 휴대폰을 누가 엿듣는가? 이메일을 누가 보고 있지는 않은가? 정보사회에서 통신매체는 생활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지만, 그만큼 개인정보 유출과 사생활 침해 위협도 늘었다. 이러한 피해의식과 의심의 대상이 국가기관이라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국민과 언론을 감시하는 정부 밑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4월 7일 방송통신위원회는 통신사업자가 수사기관 등에게 협조한 감청, 통신사실확인자료 및 통신자료 제공현황을 발표했다. 이 통계는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라 정부가 2000년부터 매년 반기별로 발표해온 것이지만, 올해 통계에서는 단연 눈이 띄는 대목이 있었다.
전체 감청 건수가 9,004건으로 사상 처음으로 9,000건을 돌파한 것이다. 특히 경악할 만한 것은 국가정보원의 감청 건수이다. 통신비밀보호법이 국정원을 위한 법으로 알려져 있을 만큼 통신 감청의 대다수가 국가정보원에 의해 실시되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지난해 국정원은 전체 감청 건수 가운데 무려 98.5%를 차지하는 등 감청 집행 기관으로서 압도적인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었다.
국정원의 감청은 일반 범죄수사와 관련이 없다. 국정원은 국가보안이나 국가기밀 침해 사안에 대하여서만 제한적인 수사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정원을 비롯한 정보수사기관들은 줄곧 통신 감청을 남용해 왔다. 특히 2005년 안기부와 국정원의 불법 도감청 사실이 드러나 전사회적으로 크나큰 충격을 주었던 바 있다. 현재의 통신비밀보호법으로 국정원의 감청 권력을 제대로 제어하는 것이 역부족임이 드러난 것이다. 2004년 1월에는 국정원이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외교통상부의 보안 유출 가능성과 관련해, 일간지 기자의 이동전화 통화내역을 조회한 것이 알려져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여기서 한술 더뜨고 있다. 한나라당 의원입법 형태를 빌은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통해 휴대폰과 인터넷으로 감청 확대를 꾀하고 있다. 이 개정안으로 달성되는 것은 국정원의 비밀권력 확대이다. 유선, 무선전화뿐 아니라 인터넷 전화, 심지어 인터넷 메신저와 P2P까지 현존하는 모든 통신사업자는 감청 설비를 구비해야만 통신서비스를 할 수 있다.
사실 수사기관이 직접 감청장비를 운용하지 않고 통신사업자를 통해 감청하겠다는 것은, 제3자를 통해 감청 집행을 더욱 투명하게 감독하도록 하겠다는 명분이 있기는 하다. 문제는 감청의 대다수를 집행하는 국정원이 ‘간접 감청’을 주요 골자로 하는 이번 개정안에 대해서 자신들에게는 예외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국인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직접 감청하겠다는 것인데, 문제는 감청 대상자가 외국인인지 내국인인지는 국정원 외에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국정원이 집행하는 감청이 누구를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것이 실제 외국인인지에 대한 것인지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다른 모든 수사기관의 감청은 법원의 영장을 통해 통제받는 반면, 국정원의 감청은 대통령 승인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번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의 또다른 쟁점은 통신사실확인자료 보관 의무화이다. 국내의 모든 통신사업자는 언제든 수사기관에 내어줄 수 있도록 모든 이용자의 통화내역과 인터넷 이용기록을 1년간 보관하여야 한다. 보관하지 않으면 3천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인터넷의 영세한 사업자까지 포함하여 25,000곳을 상회한 통신사업자가 국가의 수사 편의를 위하여 자기 비용을 들여 이런 의무를 져야 하는지도 의문이지만, 이 과정에서 행여 대량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라도 일어나면 끔찍한 결과가 빚어질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2008년 자료보관 의무화 법률에 대해 잠정적으로 위헌이라고 결정하면서 집행정지 가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 독일법의 근거가 된 유럽연합의 지침은 다수의 회원국에서 그 실행이 연기되고 있으며 유럽법원에 위헌소송도 제기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우리가 전세계에서 거의 최초로 이 제도를 도입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옥션에서 1천81만 명의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된지 겨우 1년 남짓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정부여당은 이런 우려의 목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국정원의 비밀독재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소위 ‘국정원 5대 악법’을 추진해왔으며 4월 국회 통과를 위하여 힘을 쏟고 있다. 국정원 5대 악법은 이 땅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사망선고이다.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은 물론이고, [국가정보원법 개정안]은 사실상 안기부시절의 정치사찰을 부활시키려 하고, 제2의 국가보안법이라 할 [국가대테러활동에 관한 기본법 제정안]과 [국가사이버위기관리법 제정안], [비밀의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정안]은 국가정보원의 직무범위를 무제한 확대하고 공공부문, 민간부문 정보를 국정원으로 집중시켜 관리통제할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무한권력 무소불위 국정원의 재탄생을 목전에 둔 위기에 처해 있다. 통신비밀보호법이 개악된다면 통신 감청은 국정원의 손발로써 국민에 대한 전체주의적 감시통제 도구로 기능할 것이다. 소설 속에서 보았던 빅브라더는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이 될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