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2PM 짐승간지의 상징, 박재범. ‘Korea is gay … I hate koreans.’ 이 표현에 한국사회가 동요했다. 연예인이라는 공인이 이런 표현을 해도 되는 것인가.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연습생 어린 시절에 그 정도를 가지고 나무랄 것 없지 않은가.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 사이에 미디어는 신명나는 한 판 싸움을 생중계하다시피 했고, 문화산업계는 ‘쿨’하게 재범을 퇴출시켰으며, 온라인의 일부 대중들은 마치 성전이라도 치르듯이 열폭했다. 다행히 재범의 표현이 오역에 불과하다는 주장들이 나오면서 사태는 진정 국면에 이르는 듯하다. 그렇지만 문제는 정말 해결되고 있는 걸까.
우선, 우리가 그를 어떻게 몰아붙였는지 반성해보자. 어떤 ‘공인’이 한국이 짜증난다고 하고 한국인과 한국문화가 싫다고 했으니, 관용의 규범이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한국에서 갖가지 실어증이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기본적인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 경험이 많지 않은 어린 시절의 언행에 대해 그렇게 민감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행여 그것이 원숙한 나이에 나온 발언이라 하더라도 이토록 거부반응을 보일 필요가 있을까. 성숙한 민주시민이라면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에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굳이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강한 생각을 더해보자. 우리는 연예인을 시종일관 공인이라 몰아붙이곤 하는데, 이건 사실 우리 사회의 정치문화적 풍토가 그만큼 척박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만만한 연예인한테는 엄숙을 강요하고 정작 정치인이나 기업가 같은 공인들한테는 관대한 비정상적 풍토 말이다. 장관후보자가 위장으로 전입하고 기업후계자가 편법으로 기업을 승계해도 우리는 박재범에 대해 보였던 그런 분노를 쉽사리 보여주지 못한다. 우리는 강자에게는 책임을 묻지 못하면서 만만한 약자는 희생양으로 삼아서 사이버테러를 일삼는다. 요즘 말로 하자면 한마디로 ‘찌질’하다.
우리가 누군가를 공인으로 삼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공인임을 망각하는 행위일 뿐이다. 생각해보자.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개인이라면 마땅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공적 개인이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공인된 도리를 뒤집어씌우면 사회적 시선이 그곳에 집중되어 정작 그렇게 한 사람은 주목을 덜 받게 된다. 그렇게 한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정치인이나 기업가일 수도 있고 미디어 종사자일 수도 있으며, 가장 결정적으로는 참여민주주의의 정치적 권리이자 의무를 ‘귀차니즘’에 내어주는 우리 자신일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연예인은 항상 좋은 탈출구가 된다. 우리는 박재범 사태를 통해 애국주의적 광기도 보았지만, 정치적 무기력증 또한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박재범 사태는 오역 논란과 더불어 일단락될 듯하다. 사태는 해프닝으로 끝나고 박재범은 2PM으로 복귀할 공산이 커 보인다. 그렇게 되는 것이 모두를 위해 마땅히 좋은 결과일 것이다. 그에 반해 불행스럽게도 대부분의 사람은 문제가 복잡하게 되길 꺼려한다. 문제가 복잡해질수록 어지럽고 세상이 만만치 않게 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벼랑 끝에 몰린 삶인데, 누군들 그러길 바라겠는가. 그래서 종종 우리는 아프고 힘들 때 환부를 도려내기보다는 겉모양만 봉합해서 상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으려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박재범 사태를 두고 일어났던 제반의 상황들은 우리가 이 세상을 복잡하게 보지 않으면 안 되게끔 하는 매우 강한 신호를 보내왔다. 도대체 미디어는 왜 그렇게 날 뛴 걸까. 연예기획사와 관련업계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그리고 네티즌들은 왜 그렇게 열폭한 것일까. 여러분은 이 모든 궁금증을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미디어는 ‘1인미디어-인터넷미디어-주류미디어’의 삼각동맹을 통해 근거와 실체를 알 수 없는 보도를 통해 사태를 확대재생산한다. 문화산업계는 주식시장에서 자기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고 각종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구설수에 오른 자기 식구를 과감히 퇴출시킨다. 대중들은 해묵은 애국주의에 포로가 되어 나라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애국하지 않는 시민을 ‘마녀사냥’하여 정작 사회를 위태롭게 만든다. 이 의미심장한 신호를 그냥 지나칠 수 있는가.
그런데, ‘연예인이 공인이냐 아니냐’, 혹은 ‘연예인 공인이다’라고 말하는 담론들은 이 모든 문제들을 일거에 봉합해버리는 효과를 동반한다. 모든 문제는 해당 연예인 개인의 문제로 축소되기 일쑤이며, 그와 동시에 문제투성이 대한민국은 자신의 비정상성을 은폐한 채로 유지된다. 어쩌면 이것이 모두가 바라는 결과일지 모르겠다. 나와 내가 사는 세상이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기만 한다면 별 문제가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이 모든 문제의 열쇠를 (박재범 다음으로) 이번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인 팬덤이 쥐고 있다고 본다. 물론 현재의 그/그녀들은 ‘내 남자’가 무사히 복귀할 수 있다면 다른 문제는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이게 바로 팬덤의 무한한 가능성이자 유한한 폐쇄성이라 할 것이다. ‘내 남자’에 대한 사랑을 방해하는 무리들이 고압적일수록 문제를 사회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가능해지지만, 지금처럼 오역 논란으로 문제가 봉합될 경우에는 굳이 ‘내 남자’가 계속해서 구설수에 오르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역된 것에 불과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닌 연예인‘만’이 공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며, 재범이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라고 항변하는 행위이며, 결과적으로는 문화산업계에서 여전히 쓸모 있는 유닛이라고 강변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번 사태가 오역 해프닝으로 귀결되는 것을 의아스럽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재범은 돌아와도, 연예인만 공인인 사회, 시장논리가 모든 것을 전제하는 문화산업, 모두를 광기와 폭력으로 몰입시키는 애국주의 등은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재범이 돌아오길 간절히 염원한다. 그러나 지금 미디어, 문화산업, 대중정서의 관행들이 이런 식으로 봉합되고 존속된다면 앞으로도 제2, 제3의 재범은 계속 출현할 것이다. 다음 차례는 아마 택연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닉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모두를 사랑할 수 있고, 그렇기에 그 모든 것을 돌파할 수 있는 팬심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