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저널이 100회 째를 맞이한다고 한다. 방송기술저널 초기부터,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방송기술인연합회보를 처음 만들 때부터 참여했던 관계로 100회란 숫자는 감회가 남다르다. ‘벌써’라는 생각과 함께 ‘이제야’ 하는 생각이 교차되는 게 사실이다.
방송기술저널은 2003년부터 한 달에 두 번 발행을 목표로 시작됐다. 지금이라면 계산상으론 100회를 훨씬 웃돌아야 하는데, 나의 책임이 작지 않을 듯하다. 2007년 다른 일을 이유로 방송기술인연합회를 그만뒀다. 앞에서 출발한 주자가 힘차게 발을 내딛어야 뒤의 주자가 순풍에 돛달듯 나갈 수 있는 텐데 말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자책이지 100회를 달성하기까지 힘써온 분들에 대한 책임전가가 아님을 분명하게 밝힌다.
하긴 ‘100’이라는 숫자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려운 상황과 조건에서도 방송기술연합회보, 방송기술저널로서의 역할에 얼마만큼 다가갔는가가 중요한 잣대일 것 같다. ‘100’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결국 초심을 확인하기 위한 것 아닌가
2003년 방송기술인연합회에 입사한 한 문과생은 DTV전송방식이라는 기술적 논란이 사회화된 쟁점을 만나게 됐다. 당시 방송계를 뒤흔들던 사안이지만 기술이라는 거리감으로 인해 중요성은 널리 인식되지 못했다. 사회 여론 형성에 있어 중요한 기재인 지상파방송의 전송방식 변경에 있어 당시 정부가 선택한 결론은 시청자가 아니라 ‘DTV’라는 산업적 성과였다.
당시 정부는 산업적 입장에 치우쳐 ‘DTV를 더 많이 수출하기 위해’ 내린 결론이 미국방식 ATSC였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공공의 지상파방송의 전송방식에 내린 형벌이었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그렇지만은 않다) 불특정 다수에게 돌아가는 사회적 이익보다는 헤아릴 수 있는 특정 이익을 위한 결론이었다고 판단된다.
과거지사를 이야기하기 위해 DTV전송방식 논란을 꺼내든 것은 물론 아니다. 당시의 DTV전송방식 논란과 현 정부 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방송계 논란이라는 것을 비교해보기 위한 것이다. 글로벌 미디어라는 미명하에 추진되고 있는 신문의 방송진출 논란, 일련의 방송장악 논란과 파열음, DTV에서 3DTV로 자리를 옮긴 기술적 진화 등 나열해보면 숨 가쁘기만 하다. 여기에 경쟁과 생존의 문제까지 걱정해야 하는 지상파방송사의 현재를 떠올려하는 상황이 됐다.
현 정부가 잉태한 복잡다단한 방송계의 혼돈, 정신없지만 DTV 전송방식 논란과의 유사점은 찾을 수 있다. 결론을 이야기 하자면 지상파방송사의 존립 이유를 어느 정부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는 점이다. 물론 수준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다르다.
다분히 정치적 외양을 띤 현 정부의 방송장악 논란의 근간은 지상파방송으로부터 시청자를 떼어 놓는 것이다. 대가를 지불해야 접근 가능한 신문사의 종편도 그렇고, 정부 일방의 주장만 전달되게 하려는 일련의 인사파행 문제도 그렇고, 내용적으로 지상파방송사와 시청자의 불편한 관계가 목적이다. 여기에 3TV 도입 움직임은 형식적인 차원에서 지상파방송과 시청자의 관계 맺기를 좁게 한다.
현재나 과거나 지상파방송사의 존립 기반을 저해하는 권력과 자본의 행위들은 있어왔고 앞으로 그럴 것이다. 여기의 대척점에 방송기술저널이 존재했으면 한다.
방송기술저널 100회가 또 하나의 출발점이 돼 순풍에 돛을 달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안현우 방송기술저널 전 편집장 / 현 미디어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