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속의 과거, 나의 고향 “법성포구”
EBS 편집위원 홍대용
참조기 산란시절에 법성포 칠산 앞바다에서 잡은 참조기를 소금으로 염장하여 바위에 말려 늘어 놓은 굴비두름들이 펼쳐진 포구 주변의 어려서 바라본 모습들은 아직도 나에게는 그 속에서 추억과 함께 가슴속에 담고 있는 잊지못할 한폭의 풍경화 이다. 이글은 누구나 자신의 고향에 대한 추억은 나름대로 소중하게 가슴깊이 간직하고 있을 법한 고향에 얽힌 추억이야기들, 다름 아닌 내고향 법성포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십중팔구는 영광하면 굴비이고, 그중 단연 영광굴비의 본고장이 아마 ‘법성포(法聖浦)’일 것이라고 떠올릴 것이다. 법성포구는 1000여년이란 시간속에 연년이 이어온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고장이다. 지금도 나의 뇌리 한 구석에는, 그 당시 한때 법성포구의 부둣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많은 가옥중에 있는 어느 한의원에서 어려서 유독히 심하게 앓았던 홍역 후유증 치료를 받은 후, 바람속 짱짤한 염분 냄새와 감격적인 바다의 수평선, 그리고 부서지는 햇살 등이 어우러진 파도가 넘실대는 부둣가 옆을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 손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던 기억이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현재는 그 주변이 상당부분 바다매립으로 법성포버스터미널 등의 용도로 사용되지만, 그 무렵은 법성만의 기억속 그 장소까지 바닷물이 넘실대었던 곳이다. 이후 어김없이 법성포구도 그동안 산업화 물결속에 일부 변화도 있었지만, 어렸을때부터 기억해왔던 포구의 전체적인 옛 모습은 현재도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 당시에 광주에서 법성포까지 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22번 국도가 비포장있던 관계로 약 50여 Km 남짓 거리를 지금은 30분이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를 약 4시간 가량 걸린 것으로 떠올린다. 듣기만 해도 약간 촌티와 토속적인 어감이 배어 있는 월야, 문장과 영광 등의 중간 정차지에서 승객들을 추가로 태웠었다. 도중에 내내 어느 시골길에서도 볼 수 있었던 굵직한 미루나무들로 늘어선 비포장 도로를 버스가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리면, 줄곧 내 시선은 버스 뒷 창문 넘어로 수백미터 가량 여전히 흙먼지가 희뿌옇게 계속 흩날렸던 풍경을 응시하던 기억이 또렷하다. 종점인 법성포에 들어서면 법성포터미널 맞은편에 법성포 산증인이요 법성포구의 사람들의 마음속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독바위라고 불리웠던 커다란 바위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 바위는 법성포가 형성되기 전인 태초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세월동안 법성포의 탄생과 형성과정 등의 굴곡 많았던 변화상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아무것도 몰랐을 어린 그 시절, 나는 그 독바위의 생김새를 보고 단지 기괴한 형상에 두려움과 경외로움을 가졌지만, 나중에 점점 성장하면서 오히려 친근감과 엄마품에 안겼을 때 느꼈던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곤 했었다.
법성포는 역사의 고장으로써,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이기도 하다. 백제 침류왕때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중국을 거쳐 아무포(법성포 구명)에 도착하여 최초로 불교를 전파한 곳이며, 고려조에는 국가 중추기관인 조창(부용창)이 부용포(법성포 전신 명칭)에 설치되어 국가의 재정적 측면에 기여하였으며, 고려 후기에 그 지명이 법성포로 바뀌었다. 조선조 때에는 수군의 기지인 법성진이 설치되면서 법성진성이 축조가 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영광굴비는 옛부터 임금님의 수랏상에 으뜸으로 오르는 법성포의 자랑으로, 유래를 보면 고려 예종 때 이자겸이 유배를 오게 되어 굴비를 먹게 되었는데 그 맛이 너무 좋아 혼자 먹는 것이 임금님께 죄스럽게 생각되어 어떻게 하면 이 맛을 보전하여 먼 곳까지 임금님께 진상할 수 있을까 생각한 나머지 소금에 간해 바위에 말려서 진상하게 되었는데, 결코 자기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한 아부가 아니고 뜻을 굴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굴비(屈非)로 명명한 데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 법성포구는 그동안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유사 포구 중에서 여전히 어업전지기지로서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 1개 포구의 공간적 조건은 역사적, 시간적 조건을 이어 받으면서 생동한다. 법성포구라는 작은 공간도 역사적 합의를 지니고 있으며, 이런 공감대 속에 서해안 어업•조선 생산력의 주요 동력원으로서의 역할과 서해안 해상교통로의 성쇠를 잘 반영하고 있다. 지금은 법성만 외곽의 칠산 앞바다 방조제와 서해안의 융기현상으로 토사가 메워져 옛 모습을 찾기가 어려워졌지만, 주변에는 12경이라 불리우는 천혜 절경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옥녀봉과 구수산 수리봉을 끼고 길게 만곡을 그리며 굽이치면서 흐르는 와탄천 어귀에 반달모양으로 형성된 바닷길 주변에 겹겹이 정박해 있는 고깃배와 연신 고깃배들 사이를 넘나드는 갈매기들, 그리고 바위들 사이에 쌓여있는 검붉은 해초들로 뒤덮여 있는 정경은 지금도 가슴속에는 정겨운 모습들로 와닿는다
(법성포구와 법성만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