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출판 해냄 |
지금 바로 눈을 감고 자리에서 일어나보자. 그리고 곧장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한잔 마신 후에 물병을 도로 제자리에 두고, 이번엔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본 후에 다시 PC 앞으로 돌아와보자.생각만해도 답답하신가…? 해보지 않아도 지나간 흔적이 온통 어지럽혀질게 예상되시는가…?무모한 캘빈, 위에 적은 대로 실행해봤다. 다녀오는데 5분정도 걸렸다. 물마시고 화장실 다녀오는데 장장 5분. 그것도 속속들이 구조를 알고 있는 자기 집안에서, 겨우 두가지 임무만 성공하면 눈을 뜰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참을 수 있는 일이었다. 거기다 그 두가지 일도 깔끔하게 처리 못하고 여기저기 어지럽혀 놓았다.
그런데 당신이 길을 걷다가 갑자기 시력을 잃은 채, 언제 눈을 뜰 수 있을지도 모르고 남은 생을 살아야한다면? 그 공포 무한증가의 상황을 견딜 수 있을까..?소설속에서 시력을 잃은 사람들은 이내 자신의 고상함과 자존심 따위를 잊어버리고 이내 먹고 사는 문제에만 집착한다. 편한 잠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식량을 차지하기 위해서 쉽게 폭력이 오간다. 때로는 알량한 권력이 등장하여 남을 굴종하게 만들고, 때로는 자중지란에 빠져 서로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굳이 눈이 멀지 않은 우리 모습도 이와 별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비싼 집에 살기 위해 분양사무소 앞에서 장사진을 이루고, 한푼이라도 더 차지 하기 위해 서로를 견제하고, 기득권이라는 이름으로 없는 자에게 불균등한 처우를 제공하기도 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대신 시기하고 음모하여 생채기를 남긴다.
그러기에 이 소설은 현대인을 향한 우화다. ‘눈이 멀면 어떻게 될까..?’는 표면적인 질문일 뿐 실상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실 우리는 이미 욕망에 눈이 멀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