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1일, 우리나라 지상파 방송이 역사적인 디지털 전환의 첫 스위치를 올린다. 2008년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의 디지털 전환과 디지털 방송의 활성화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이 공표되면서 시작된 지상파 방송의 디지털 전환사업이 경북 울진지역에서 첫 결실을 맺게 되기 때문이다. 이 날부터 경북 울진군 일대의 2만여 가구는 그간의 지상파 아날로그 방송 대신에 보다 품질 좋은 디지털 전파를 수신하며, 지상파 디지털 방송의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된다. 우선 이번 울진 ASO(Analog Switch Off) 시범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관련 시설구축과 홍보, 지원 등에 최선을 다하신 여러 지상파 방송사와 유관부처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감사드리고 싶은 분들은 바로 시청자 여러분이다.
지상파 디지털 전환은 ‘데이터 방송, 양방향 서비스, 선명한 화질, 난시청 해소, 다채널화’ 등을 모두 담보할 수 있는 기술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 한가지 치명적인 난제가 있다. 그것은 ‘수신기 교체’에 따른 시청자의 수고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수신기의 교체는 단순히 비용을 지불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시청자 스스로가 아날로그 방송과 디지털 방송의 차이를 인식하고, 필요성을 느껴 수신기를 마련해야 하는 문제다. 만약 시청자가 디지털 방송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혹은 디지털 방송 전환을 불편하게 여긴다면 디지털 전환 사업은 실패하고 만다. 따라서 디지털 전환 사업의 주체가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가치는 시청자에게 디지털 전환의 필요성을 확실히 인식시키고 시청자의 불편을 최소화하는 일, 곧 얼마나 시청자를 배려하느냐에 둬야 할 것이다.
2010년 1월 현재 시청자들이 디지털 전환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는 비율은 겨우 50%였다. 우리나라와 같이 2012년 말 디지털 전환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는 영국이 2008년에 이미 인지도가 90%에 도달했던 것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디지털 전환 인지도는 처참하다고 해야 할 정도다. 이처럼 디지털 전환에 대한 시청자들의 인지도가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조심스럽지만 ‘관련부처의 위기의식 부족’을 가장 큰 이유로 꼽고 싶다.
올해 초 정부는 디지털 전환 관련 홍보예산을 140억원에서 25억원으로 대폭 삭감했다. 예산 삭감과 관련해서 정부는 ‘낮은 지상파 직접수신 가구비율’과 ‘높은 유료방송 가입비율’을 이유로 들었다. 직접수신 가구가 적으니 홍보예산을 그만큼 줄여도 되고, 유료방송을 시청하는 가구가 많으니 지상파의 몫은 그만큼 줄어도 된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정부의 이와 같은 판단에는 중대한 오류가 있다. 우선 ‘낮은 지상파 직접수신 가구비율’이 아날로그 전파의 근본적인 한계로부터 비롯됐다는 사실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바꿔 말하면, 디지털 전파를 사용할 경우 기존의 난시청 문제는 획기적으로 해소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현재 유료채널에 가입한 87.9%의 가구 중에서 ‘단지 지상파방송을 잘 보기 위해서’ 유료방송에 가입했다는 57.1%의 가구는 지상파 직접수신 가구로 되돌아설 가능성이 높다(2009년 TV 시청행태조사, 방송통신위원회). 여기에 정부가 ‘유료방송의 역할’을 오해한 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지상파 방송은 기본적으로 무료 보편적인 서비스이다. 대한민국 영토 내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최소한의 비용으로 방송을 수신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다. 반면에 유료방송은 지상파와 달리 상업적인 목적으로 시청자에게 방송을 판매하는 기업이다. 무료로 방송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기회를 두고 시청자들이 별도의 사용료를 부담하면서 유료서비스를 계속 사용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일종의 직무유기라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정부와 지상파 방송사는 지상파 디지털 방송을 수신하면 다양하고 품질좋은 무료 보편적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시청자들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홍보할 필요가 있다.
시청자를 위한 또 다른 배려로 ‘수신 장비 교체’ 단계에서 발생하는 불편을 최소화하는 일을 들 수 있다. 지상파 송출방식을 디지털로 변경하는 일은 자연스레 수신기의 교체라는 과제를 안겨줬다. 그리고 수신기의 교체는 결국 크든 작든 모든 시청가구에 비용부담을 발생시키는 일이 됐다. 시청자들로서는 비용에 대한 부담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기기 구매에 따르는 불편도 없기를 바랄 것이다. 더구나 디지털 전환은 기본적으로 국가의 주파수 운용정책의 변화라는 점에서 사업주체들은 시청자들의 설치 및 비용부담을 줄일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나라는 디지털 전환에 따르는 수신장비 구매설치 및 비용을 각 가구에서 부담하도록 하고 있다. 다만 방송통신위원회가 기초생계비 수급대상자와 차상위계층 및 소외계층 등 총 117만 가구를 대상으로 DtoA 컨버터 및 디지털 TV 구매비용을 일부 지원하는 법안을 마련해둔 상태다. 그러나 기획예산처는 이 중에서도 90만 가구 이상을 배제하고 고작 21만 가구를 대상으로만 지원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것은 우리보다 앞서 디지털 전환을 실시한 미국의 사례다. 미국 FCC는 미국 내의 모든 가구에 선착순으로 1가구당 2매의 DtoA 컨버터 쿠폰을 신청할 수 있도록 법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게다가 디지털 전환 완료를 앞두고 이 예산이 바닥나자 FCC는 컨버터 예산을 추가로 늘리기까지 했다. 이에 비한다면 우리 정부의 디지털 전환 예산 씀씀이는 지나치게 야박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일반가구의 디지털전환 인지도 및 디지털TV보급률이 각각 48.1%, 47.9%인 것에 비해 지상파 직접수신의 주대상인 저소득층의 인지도와 보급률이 각각 30%, 20% 정도에 머물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2009, 방송통신위원회), 정부의 예산감축이 결과적으로 디지털 전환의 순조로운 진행을 방해하는 주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세계 최초로 디지털 전환을 완료한 미국에서는 한때 ‘먹통쇼크(Go Black Shock)’라는 말이 유행했다. 아날로그 방송이 종료된 뒤 디지털 전환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가구의 TV 수상기가 먹통으로 변해버릴지 모른다는 우려 섞인 표현이었다. 그런 미국의 디지털 전환 준비기간은 10년이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준비기간이 5년도 채 되지 않아 비교도 안될만큼 짧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려면 우선 이번 울진 ASO의 전체적인 진행상황을 꼼꼼히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를 통해서 디지털 전환이 근본적인 취지를 잃지 않고 있는지, 적절한 방법을 통해 시청자들을 배려하고 있는지를 먼저 고민해봐야 하는 것이다.
부디 이번 울진 ASO와 함께 차후 이어질 충북 단양, 전남 강진, 제주도의 ASO를 통해 매번 조금씩이나마 시행착오를 없애 디지털 전환의 근본 취지를 달성하길 바라며, 궁극적으로 2012년 12월 31일 디지털 완전전환 시점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성공적으로 ASO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