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선 선한 사마리아인 조항
최근 국내 대부분의 종교단체들이 종교차별금지법 제정을 제안했다. 현 정권이 특정 종교,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특정 종교의 일부 분파들에 드러내놓고 지나치게 친화적인 태도를 보여 온 것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서도, 현 정권은 정치가 종교로부터 분리돼온 역사를 거스르는 듯해 씁쓸할 뿐이다. 대한민국은 특정 종교 분파를 국교로 인정한 바 없다고 촛불을 들어야 하는 불행한 사태가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종교 얘기로 말문을 연 것은, 인터넷 통제와 표현의 자유 제한을 위해 선한 사마리아인을 욕되게 한 옛 정보통신부의 정책과 이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현 방송통신위원회의 행태를 비판하기 위함이다.
이른바 망법으로 불리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이 입법예고 됐고, 지난 8월8일 공청회까지 열렸다. 사전검열 기제로 비판받는 실명제(본인확인제) 적용 대상을 포털(일일평균 이용자 수 30만명 이상), UCC(〃), 인터넷언론(20만명 이상) 등 세 가지 유형의 서비스 사이트에서 10만명 이상의 모든 서비스 사이트로 전면 확대하는 내용이다. 적용 대상 사이트가 37개에서 268개로, 적용 이용자 수는 전체 인터넷 이용자의 51.5%에서 74.5%로 증가한다. 실명제가 사실상 인터넷 전반을 포괄하는 셈이다.
망법에는 사전검열 기제로 비판받는 실명제만 있는 게 아니다. 사후 사적 검열 장치들도 있다. 포털뿐 아니라 모든 웹사이트 운영자를 포괄하는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가 누군가 요청만 하면 게시물을 임시삭제하고, 게시물에 대한 감시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 각종 규정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사전 및 사후 검열 장치들은 2007년 5, 6월 열린우리당 지배의 17대 국회에서 도입됐다. 옛 정통부가 마련한 망법 개정안이 이때 통과돼 같은해 7월27일 발효했다.
이런 장치들 도입을 위한 옛 정통부의 작업은 2005년 5월부터 시작됐다. 그해 12월 옛 정통부는 ‘인터넷 이용자의 요청이 없어도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가 선의에 기초해 게시판 정보를 임시적으로 차단할 경우, 이로 인한 배상책임을 면제받는 ‘선한 사마리아인 조항’’을 도입하는 내용의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마련해 여론수렴 작업에 들어갔다고 발표했다. 이때 마련된 개정안은 2007년 5, 6월 정보통신망법 개정 내용과 다르지 않다.
옛 정통부는 1996년 2월 제정된 미국 통신품위법(Communication Decency Act) 제230조의 ‘선한 사마리아인 조항’을 근거로 제시했다.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가 사이버 명예훼손, 언어폭력 등에 대한 피해구제에 나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국내에서도 미국과 같은 ‘선한 사마리아인 조항’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옛 정통부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누락시키며, 선한 사마리아인 조항의 맥락을 180도 뒤집었다. 미국 통신품위법이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에게 중립적 전달자 지위를 보장하고 있음을 알리지 않은 것이다.
미국 통신품위법 제230조의 제목은 ‘침해성 내용물(offensive material)의 사적 차단 및 선별 행위에 대한 보호’이다. 이 조의 C항 ‘침해성 내용물의 선의의(Good Samaritan) 차단 및 선별 행위에 대한 보호’는 크게 두 축으로 이뤄져 있다. 하나는 ISP와 포털 등에 ‘중립적 전달자’(neutral carrier) 지위를 보장하는 것으로, “쌍방향 컴퓨터 서비스(interactive computer service)의 제공자나 그 이용자는 제3의 정보 콘텐츠 제공자가 생산한 정보의 발행자(publisher)나 발언자(speaker)로 취급돼선 안 된다”는 내용이다. 쌍방향 컴퓨터 서비스 제공자와 그 이용자가 책임을 지는 경우는, 문제가 되는 콘텐츠의 생산이나 발전 과정에 이들이 직접 개입돼 있거나, 자신의 정보통신망에서 유통되는 콘텐츠의 잘못, 이를테면 명예훼손이나 저작권 위반 등에 대해 사법당국의 명확한 통지를 받은 뒤 적절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을 때 등 매우 제한적이다. 포괄범위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쌍방향 컴퓨터 서비스 제공자와 그 이용자’는 우리나라로 치면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와 그 이용자로 보면 된다.
다른 하나가, ‘중립적 전달자’ 지위 규정의 바로 뒤에 이어지는 ‘선한 사마리아인 조항’이다. “쌍방향 컴퓨터 서비스의 제공자나 그 이용자는, 헌법에 의해 보호받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외설스럽고(obscene), 음란하고(lewd), 선정적이고(lascivious), 추잡하고(filthy), 지나치게 폭력적이고(excessively violent), 가학적이거나(harassing) 기타 반대할만하다(objectionable)고 생각하는 내용물에 대한 접근이나 이용을 선의로 제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취한 행동을 이유로 책임을 져선 안 된다"는 내용이다.
미국 통신품위법 제230조는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에 대한 중립적 전달자 지위 보장을 기본으로 하면서, 이들 제공자가 선의에 따라 자발적으로 취한 침해성 내용물의 접근 제한 행위에 대한 면책을 부여하는 형태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옛 정통부는 ‘선의에 의한 자발적 접근 및 이용 제한’만을 특권화시켜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의 광범위한 사적 검열을 부추기는 쪽으로 정보통신망법을 개악하는 데 이용했다. 중립적 전달자 지위 보장이라는 통신품위법의 기본 맥락을 아예 외면하고 거꾸로 뒤집어버린 것이다. 옛 정통부가 통신품위법 제230조를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설명하지 않는 한, 이는 사악한 무시(malicious neglect)에 해당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옛 정통부의 모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7월 방송통신위원회는 망법을 바꿔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의 불법유해정보 신고센터 운영을 강제하고,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의 불법정보 관리실태를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충실히 사적 검열을 수행하는지를 수시로 감시하겠다는 것이다. 첫 단추부터 다시 끼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