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새로운 싹은 현실에 있다!
지상파방송 3사와 KT가 지난해 12월 맺은 IPTV를 통한 지상파방송 콘텐츠 재송신 수수료 합의가 파기될 운명에 놓인 듯하다. 당시 합의 내용은 ‘선 재송신-후 정산’과 ‘KT와 지상파방송 공동의 콘텐츠 펀드 조성’ 두 축으로 이뤄져 있다. 이 합의는 최근까지 지켜지지 않았다. KT는 합의 내용의 수정을 지난 4월부터 요구하면서 콘텐츠 수수료를 지상파방송에 지급하지 않았고, 펀드 조성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합의 수정을 둘러싼 협상이 벼랑 끝에 몰리면서 지상파방송이 오는 17일까지 주문형 비디오(VOD) 송출을 중단하겠다고 하자, 최근 그동안 VOD 사용료를 지급한 게 지금까지 합의가 이행된 전부다.
애초 갈등의 싹은 ‘선 재송신-후 정산’이라는 합의 내용 자체가 잉태하고 있었다. KT로서는 IPTV 상용화를 위해 지상파방송 콘텐츠를 시급히 재송신하는 게 우선순위에 있었고, 재송신 수수료에 대한 면밀한 계산은 뒤로 미뤄뒀다. IPTV 가입자 추이에 따라 재송신 수수료가 적정한지 과도한지는 나중에 드러날 문제였던 것이다. 지상파방송도 IPTV 재송신 수수료를 계기로 삼아 케이블방송의 무료 사용 관행에 제동을 걸 계산을 위해 ‘선 재송신-후 정산’에 동의했다.
‘합의사항을 지키라’는 지상파방송의 요구나, ‘우리와 경쟁관계에 있는 디지털케이블방송의 지상파방송 콘텐츠 무료 사용에 대해 왜 미온적으로 대처하느냐’는 KT의 항변에도 타당성이 있는 게 사실이다. 벼랑 끝까지 몰린 지금의 상황에서 제3자의 ‘관심법’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서로가 ‘윈윈’하는 모델이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해법은 재송신 수수료가 많다 적다는 논란이 아니라, KT와 지상파방송이 만들기로 한 250억원 규모의 ‘콘텐츠 제작펀드’에 있다.
국제적으로 콘텐츠의 저작권은, 제작비를 어떻게 조달하는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의 차입제작 방식(deficit-financing)은 제작비의 60~70%를 조달하는 제작사가 2, 3차 저작권을 보유하고 방송사는 몇 차례에 걸친 콘텐츠 송출권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반면, 제작비에다 일정한 이윤을 방송사가 제작사에 제공하는 영국의 제작비 보장 방식은 저작권의 대부분을 방송사가 보유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에 비춰보면, 굳이 KT가 종합편성채널에 진출하지 않아도 지상파방송과의 ‘콘텐츠 펀드’는 IPTV 사업에서 양질의 콘텐츠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KT와 지상파방송이 만드는 콘텐츠 제작펀드는 KT에게 2, 3차 저작권의 상당 부분을 보장하게 된다. 지상파방송은 자체 네트워크를 통해 몇 차례 송출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한다. KT는 이른바 ‘롱테일’ 전략을 사용할 수 있는 콘텐츠를 확보할 수 있다. 여기서 나오는 수익은 KT와 지상파방송이 일정한 비율로 배분하면 되는 일이다.
최근 KT는 자신이 보유한 독립제작사 ‘올리브나인’을 매각하겠다고 밝히고 나섰다. ‘올리브나인’ 매각 시도는 IPTV 직접사용채널을 요구하고 있다거나 종합편성채널 진출을 꾀하고 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도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게 사실이다. KT로서는 현 정권의 미움을 살지도 모를 일이다. 방송통신위원회가 KT에게 종합편성채널에 진출하라고 끊임없이 추파를 던지며 요구해 왔다는 것은 통신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KT의 선택은 매우 현명하다고 판단된다.
콘텐츠 펀드는 지상파방송으로서도 손해 볼 것이 없다. 오히려 종합편성채널이 글로벌 미디어 그룹을 보장하는 듯한 ‘사기’가 횡행하는 상황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현실에서 반격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굳이, 재벌 대기업에게 방송뉴스와 보도를 헌납하지 않아도, 돈과 노하우가 결합하면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글로벌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음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단기간에 베스트셀러가 되지는 않아도 꾸준히 수용자와 이용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콘텐츠, 각국의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어 전 세계 시민의 공통의 관심이 되고 있는 전 지구적 사안에 대한 탐사보도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게다가, KT와 만드는 콘텐츠펀드를 만드는 과정에서 고민하는 저작권 문제는 지상파방송과 독립제작사 간에 겪는 저작권 갈등을 해결하는 ‘살아있는 경험’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달리 보면 이를 현실화시키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지상파방송의 ‘무능’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려울 때일수록 내실을 다지는 것은 맞다. 하지만 얼마 전 KBS 이병순 사장(?) 체제 아래에서 벌어진 것처럼 ‘인사이트 아시아’ 팀을 아예 해체해 버리는 황당한 사건은 결코 내실을 다지는 것과 맞지 않다. 브랜드와 미래를 포기하는 자해행위이기 때문이다. 뉴스, 보도 부문에서는 정권의 통제 시도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고, 기타 부문에서는 길게 보고 새로운 사업모델 수립을 위한 기획을 동시에 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나친 주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