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디지털 전환, 다르면 좋겠다
미국은 한차례 연기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지난 6월12일, 약 60년 간 송출해온 NTSC 아날로그 컬러TV 방송을 종료하고 ATSC 디지털TV 방송으로 전면 전환하였다. 약 1억1,400만 가구의 2.5% 정도인 280만 가구가 준비를 못했다지만 대체로 큰 혼란없이 넘어갔으며, 어떤 이는 호들갑 떨었지만 큰 일이 벌어지지 않았던 Y2K 같다고 논평하기도 했다. NTSC 권에서는 미국에 이어 일본도 약 2년 후인 2011년 7월24일 아날로그방송을 끄고 일본 독자규격의 ISDB-T 디지털TV 방송으로 전환하게 되며, 다음해 2012 년 12월 31일에는 우리나라도 32년간 쓰던 NTSC 컬러방송을 중단하고 ATSC 방송으로 전면 전환할 예정이다. 나라마다 사정이 제각각 다르겠지만 타산지석의 효과를 감안할 때 전세계적으로도 무난하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최근 방송통신위원회가 향후 5년간의 정책방향을 담은 ‘디지털 전환 활성화 기본계획’을 확정하면서 디지털전환 일정에 연기는 없다고 선언한 것도 그런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내년에는 분지형 소도시에서 시험적으로 아날로그방송을 중단하는 ‘종료 시범사업’을 추진하겠다는 계획도 밝히는 등, 미국에서의 전환 과정을 거울삼아 정책기조를 좀 더 구체화하고 있다. 특히 시범사업은 스무드한 전환을 위해 대단히 필요하며, 그런 과정을 통해 문제를 조기에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전환 기간 동안 아날로그와 디지털TV를 ‘동시방송(simulcast)’해야 하기 때문에 자금이 제때 공급되고 DTV수신기 보급에 차질이 없다면 방송사로서는 가능한 그 기간을 당기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동시방송 기간 동안 투입될 일체의 경비와 노력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二重苦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4년 이상 지속되었던 DTV 전송방식 논란은 상황이 변한 현 시점에서 볼 때 아쉬운 부분이 있다. 전송방식 논란이 방송기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일조하였다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필자는 1995년 1년 동안 현재의 ‘차세대방송포럼’의 출발이 된 ‘한국HDTV 표준방식 연구협력 콘소시엄’ 산하의 ‘HDTV 전송규격 연구 소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지상파TV 전송방식 표준화 논의를 진행한 바 있다. 논의 결과, 모든 방송 미디어에 대해 기본 구조가 통일되어야 하며, 위성과 케이블 및 지상파방송이 공존하는 상황을 전제로 수신기 공통부분을 최대화할 수 있어야 하고, HD와 SD를 동시에 만족하는 통일된 방식을 채용해야 한다는 등의 기본 지침을 확정하였었다. 그런 기본지침에 따르면 사실상 유럽방식인 DVB-T가 더 유리하였지만, 2년 후인 1997년 콘소시엄에서 재논의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모 방송사와 가전사들이 ATSC 방식을 강력히 추천하면서 급기야 몇 가지 비교항목을 담은 서면 평가 점수로 방식을 조기 선정하게 되었고, 그것이 후일 전송방식 논란의 최대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방송사는 후일 입장이 변하여 유럽방식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비교실험을 요구하는 등 전송방식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하였는데, 그런 사실이 말해주듯 우리나라 디지털TV 전환의 역사는 혼돈 가운데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전송방식 논란을 거듭하다가 2004년 여름에 대타협을 이루면서 국민적 사안인 만큼 사회적 합의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교훈은 얻었지만, 그 과정에서 디지털 전환과 관련한 방송사 실익을 철저히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특히 반복되는 경기침체와 케이블TV의 약진, IPTV 상용화, 광대역 무선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따른 모바일IPTV 가능성 등, 戰場이 대폭 확대되는 현 시점이기 때문에 더더욱 아쉬운 것이다.
이를테면, 디지털전환 자금 조성이나 디지털전환 이후의 방송주파수 대역 확보 및 활용에 관한 정책적 지원 약속 등을 철저히 이끌어 냈어야 했다. 또한 당시 지적된 ATSC 방식의 문제점 보완을 위한 대책, 이를테면 디지털 난시청 해소를 위한 지원책이나 이동수신 기능의 대체수단으로 발목 잡힌 지상파DMB 송중계시설의 확대 지원 약속 등을 받아냈어야 했다.
더 나아가, 디지털 전환을 계기로 사업자 개념을 단순 방송채널사업자로부터 멀티플렉스사업자(Multiplexer)로 진화시킬 기회를 놓친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발전된 기술과 편성정책을 구가할 수 있으며 MMS(Multi-mode Service)도 이리저리 끌려 다니지 않고 보다 유리하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디지털 전환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아날로그방송과 별반 차이없는 방송채널사업자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융합시대에 생존능력이 그만큼 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배 떠난 뒤에 말해 무슨 소용 있을까만 溫故而知新이라, 더욱 척박해지는 미래를 염두에 두고 살아나갈 궁리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소모적 논쟁이 좀 더 일찍 끝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를테면 유럽에서조차 DVB-T 방식으로 모바일TV를 상용화한 나라가 없으며, 오히려 미국에서는 ATSC-M/H(Mobile/Handheld) 방식으로 올해 말까지 28개 지역 70개 방송사가 모바일TV를 정규 방송하겠다고 하니, 실로 예측할 수 없는 변화 앞에 과거의 논쟁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앞에 열거한 몇 가지 때늦은 주문을 뒤로 하고 디지털전환 과정에서 지상파방송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선택 가능한 모든 정책 발굴과 추진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아날로그신호가 디지털신호로 바뀌는 단순한 디지털 전환, 소위 ‘1:1 전환’ 개념으로부터 지상파 생존에 유익한 미래 대응적 전환 개념으로 진화시킬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디지털전환 사업을 계기로 직접수신 시청자도 양방향서비스를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기술개발 및 구축 정책을 추진하여 융합시대에 걸맞는 공적 서비스를 제공해 보자는 것이다.
즉, 디지털컨버터에 인터넷접속 기능을 추가하여 직접수신 가구에서도 양방향 TV포털 서비스를 즐길 수 있도록 해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닷TV 서비스 등 지상파방송사들이 개발 중인 TV포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면서, 점차 일체형 TV에까지 확산시킬 수 있도록 해보자는 것이다. 의지에 따라 관련 법규 문제도 기술개발과 정책개발을 통해 견인할 수 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홈네트워크까지 감안한 스마트그리드 기술도 접목시킬 수 있도록 전력선통신과의 결합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DTV와 인터넷 리소스가 공존할 수 있는 융합수신 개념을 확보할 수 있게 되어 지상파 디지털 전환의 가치와 실효성이 더욱 높아질 수 있을 것이며, 다른 나라에서도 참고할 만한 전환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 방송분야에서도 IT 강국이라는 찬사를 들으려면, 디지털 전환에 있어서도 다른 나라와는 다른 그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이며, 그렇게 되기를 소망해 본다.
(이종화, KBS 방송기술연구소, 공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