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초 <조선일보>는 난데없이 "열혈 초등학교, 이 폭력 웹툰을 아십니까"라는 파격적인 헤드라인 기사를 1면에 내세운바 있다. 동시에 그들은 최근 만연해지고 있는 학교 폭력의 근본적인 이유를 열혈 초등학교와 같은 문화 콘텐츠에서 찾으며 근엄하게 꾸짖었다. "이런 더러운 콘텐츠야말로 아이들을 병들게 한다"고.
하지만 더 묘한 것은 이러한 <조선일보>의 으름장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에 있다. 아니, 실제로 아주 잠시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조선일보>의 주장은 꽤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졌다. 소위 주류언론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미디어들은 이러한 <조선일보>의 놀라운 특집에 고무된 듯 연이어 ‘저질 문화 콘텐츠’를 비판하고 나섰고 이러한 비틀어진 의견들이 주류 여론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획일화된 미디어 단방향성에서 벗어난 지금의 21세기는 이러한 말도 안되는 불통을 거부하고 나섰고 결국 ‘저질 문화 콘텐츠의 주범’이라고 낙인찍힐뻔한 웹툰 작가들의 반발까지 들불처럼 번지자 주무부처인 방송통신위원회는 ‘유해 웹툰 지정’에 전향적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SNS의 공이 특히 컸으니, 마크 주커버그나 에반 윌리엄스의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이라고 춰야하나.
여기에서 우리는 이 <조선일보>의 으름장을 통해 새삼스럽게도 ‘공포 마케팅의 실체’와 마주하게 된다. 공포 마케팅. 한 마디로 공포를 파는 주류 미디어의 상술이자 ‘꼼수’를 일컫는 말. 그렇다. 사실 공안정국이라는 말과 비슷한 이 ‘공포 마케팅’은 비단 <조선일보>의 전유물은 아니리라. 우리는 대선을 앞둔 2012년 하반기에도 여전히 공포 마케팅의 바다에서 힘없이 표류하고 있다.
한 때 ‘주폭척결’이라는 단어가 대부분의 미디어를 점령한 적이 있었다. 주폭은 ‘주취 폭력자’를 뜻하는 말로서 동네에서 술을 먹고 폭력을 휘두르거나 난동을 부리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니 ‘주폭척결’은 이러한 주취 폭력자를 척결하고 처단하자라는 의미가 되는 셈이다. 자, 이제 생각해 보자. 이 ‘주폭척결’이라는 단어에 숨어있는 매력적인 흡인력을.
주폭척결은 원래 2011년 초 충북경찰서 김용판 당시 경찰청장이 술에 취해 관공서나 지구대 등에서 난동을 부리는 사람을 ‘주폭’으로 규정하고 이를 처단해야 한다는 방침을 천명함으로서 유명해진 단어다. 그리고 예의 이 대목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조선일보>는 이를 대서특필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주폭의 위험성과 폭력성을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이까지는 좋다. 훌륭한 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면에 있다. 이 ‘주폭척결’의 강력한 스탠스가 <조선일보>를 통해 극대화되며 사회적 불안을 더욱 고조시킨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항변할 것인가. 물론 이웃에 피해를 주고 기물을 파손하는 주폭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이 단어를 통해 더욱 공포를 조장하고 신문을 팔고 클릭수를 올렸다는 오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이 사회에 만연한 근본적인 폐혜를 되짚기는 커녕 모든 원인을 ‘술’에만 돌리며 단순하고 비뚤어진 잣대를 ‘처벌’에 방점을 찍은 공안주의로 일관했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비판은 지난 여름에 있었던 태풍 볼라벤 보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당시 태풍 볼라벤이 한반도를 덮치기 시작하자 대부분의 미디어, 즉 언론들은 일제히 태풍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서며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자극적인 공포만 팔기 시작했다. 심지어 한 종합편성채널의 기자는 말도 안되는 줄 매듭으로 자신을 꽁꽁 묶고는 위험천만한 보도 멘트를 날려 문제가 되기도 했다. 더 무섭게! 더 심각하게! 태풍에 대한 경각심도 좋지만 미디어의 근간은 ‘세련된 공리주의’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듯 하다. 모두들 그저 공포를 팔기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던 것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자 미디어 공포 상인들의 주요 상품이 바뀐듯 하다. 바로 ‘성’이다. 성폭행, 성추행, 근친강간 등등…당장 ‘성폭행’이라는 키워드로 인터넷에 검색을 하면 관련 기사가 하루에도 1,000여 개씩 쏟아져 나오는 판국이다. 이쯤되면 대한민국은 강간의 왕국이라 불릴 정도로 리얼한 동물들의 나라로 보인다. 과연 이 것이 정상적인 현상일까?
여기서 우리는 이 공포를 파는 미디어 상인들로 인한 이해득실을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까짓것, 공포를 판다는 것이 ‘긍정적인 일’이라면 당연히 사회적으로 용인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기회비용을 따져보자는 것이다. 우선 ‘공포를 파는 일이 긍정적인 경우’는 당연히 사회적인 경각심을 일깨워 준다는 것이겠다. 그리고 ‘공포를 파는 일이 부정적인 경우’는 사회의 경색화와 정치적 의도가 짙다는 의혹이 될 수 있겠다. 여기에서 ‘긍정적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태풍 볼라벤을 두고 미디어가 공포를 팔아준 덕분에 경각심을 가지고 대비하게 되었다"라거나 "성폭행이나 주취자에 관한 공포가 번져준 덕분에 사회적 정의가 올바로 설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고 전한다. 역으로 ‘부정적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사회가 지나치게 굳어버리고 경색화된다"와 심지어 "대선 등 정치정국에 접어들자 국민의 불안감을 고조시켜 공안정국을 조성해 보수적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아닌가"라고 반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러한 미디어의 공포 마케팅 자체가 우선 첫째, 정보의 과잉에서 기인한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것이고 둘째, 사태 해결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주범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비론에서 벗어나 더욱 전향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이 두가지를 기억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국민은, 거대한 음모에서 속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해답은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나쁜’ 공포 마케팅의 특징은 대게 거대한 정치적 배후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하며, 당장 눈 앞의 편한 대상을 낙인찍은 다음 문제를 단순화 시킨 후, 우리 모두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도 전에 그 문제를 ‘공포’로 포장해 휙하니 던져놓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물론 지금이 주류 미디어가 입을 열면 대부분의 국민 모두가 수긍하는 세상은 아니다.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이나 박정희 정권 당시 ‘공안정국’은 이제 과거에나 통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 확실하다던 ‘북풍효과’도 이제는 미비하다. 우리에게는 인터넷과 SNS라는 무기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대목에서도 인터넷과 SNS자체의 폐쇄성에서 기인한 왜곡된 정보의 범람과 더불어, 심지어 이 같은 새로운 미디어의 수단에서조차 ‘성폭행 관련 키워드’가 급상승하는 현실은 우리를 씁쓸하게 만든다. 부디 주류 미디어에 영향을 받아 되새김질만 하는 ‘뉴미디어’가 되지 않길 바라며. 공포를 파는 미디어 상인들의 폐부를 깊숙이 찔러 보자. 그 이면에 숨은 대선 정국의 교묘한 언론 플레이를 이해하면 더 좋고. 사실 해답은 그 다음에 내려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