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를 걷다

문경새재를 걷다

1297
   
 

걷기가 새삼스러운 유행으로 떠오르면서 제주도 올레길, 북한산 둘레길처럼 이름없던 길들이 갑작스런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유행이란 달리 말하면 ‘쏠림’이기도 해서 몇몇 이름난 길들은 유난히 사람들이 붐비는 반면에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어떤 길들은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여기,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오다니던 길이 있다. 경상도의 선비들이 한양에 과거시험을 보러 갈 적에 꼭 넘어야만 했던 길, 한강과 낙동강을 이어주는 가장 높고 험한 고개. 바로 경상북도 문경과 충청북도 충주를 있는 문경새재[聞慶-]다.

문경새재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혹은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에 있다고 해서 “새(사이)재”, 새로(新) 생긴 고개라서 “새(新)재”라는 등 그 유래에서부터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저없이 추풍령을 가장 큰 고개로 꼽는 요즘과는 달리 조선시대만 해도 백두대간을 넘는 최고의 고개는 죽령(좌로), 추풍령(우로)와 더불어 문경새재(중로)가 꼽힐 정도였다.

문경새재를 잇는 제1~3관문까지의 거리는 6.5km의 무척 완만한 경사길로 펼쳐져 있어서 3시간 남짓이면 걸어서 넘을 수 있을 정도다. 제주도 올레길을 걷는데 보통 4시간이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멀지 않은 거리.
제1관문인 주흘관 앞에는 박물관과 장승공원이 있는데, 저마다 다른 소망을 품은 다양한 표정의 장승들이 도심의 공원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주흘관을 지나 1km 남짓을 걸어가면 드라마 ‘태조 왕건’ 등을 찍은 KBS드라마 오픈 세트장이 있으니 시간이 넉넉하다면 잠시 구경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제1관문을 어느 정도 벗어나면 넓게 정돈된 황토길 주변의 수풀 사이로 좁고 굽은 오솔길이 보이기도 하는데, 바로 이 길이 옛 과거길을 길이 정돈되기 이전의 상태로 보존해놓은 것이다. 옛 과거길은 비단 길만 보존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시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시와 문구들을 군데군데 마련해놓고 길을 걷는 이들에게 따분한 글공부와 여행길에 지친 선비들의 재치를 엿볼 수 있도록 해두었다. 옛 선비들의 글에 취해 길을 오르다가 주막이 보이면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다 (아쉽지만 실제로 영업하지는 않는다).

어느샌가 길옆으로 조그만 물길이 나있다. 그 물길을 따라 제2관문인 조곡관에 다다를 즈음이면 용추폭포와 조곡폭포가 시원하게 우리를 반긴다. 처음보다는 조금 가파른 길을 따라 제2관문까지 올라오며 생긴 갈증을 조곡약수로 가시고, 다시 길을 걷자. 제2관문에서 500m 쯤 지나면 문경새재 아리랑비가 있다. 커다란 돌에 새겨진 아리랑을 직접 들어보고 싶다면 그 옆에 설치된 버튼을 누르면 된다..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로 각각 녹음된 아리랑을 언제든 들을 수 있다. 또, 제3관문을 향해 한참을 걷는 도중에 책 바위를 발견하게 되면 가까이 다가가서 돌로 정성스레 괴어놓은 종이들을 하나하나 가만히 살펴보시길 권한다. 그 옛날 선비들이 과거를 가는 도중 쉬어 가면서 장원급제의 소원을 빌었다는 그 돌무덤에는 이제 고시같은 큰 시험을 준비하는 요즘 사람들의 바람들이 빼곡이 들어차있다. 과거의 전통에 현재의 바람이 절묘하게 투영된 모습으로.

과거시험을 떠나던 조선시대 영남의 선비들은 죽을 쑬까 봐 죽령을 피했고, 추풍낙엽 떨어질까 봐 추풍령을 피했고, 오직 ‘경사만을 듣기 위해(聞慶)’ 이곳 새재를 지나갔다고 한다. 그들의 과거급제를 향한 바람이 오죽했으면 문경새재의 곳곳에 책 바위, 소원성취탑, 장원급제길 같은 이름이 있을까 싶다.

문경새재 과거길은 2006년 당시 건설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길’에도 선정됐을 만큼 꼭 한번 걸어볼만한 길이다. 봄이 오고, 나무마다 새싹이 한참 돋아나는 지금 문경새재를 걸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