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이 거창한 이야기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사회구성체를 논의하고, 계급론을 설파하는 때가 잦긴 하다. 하지만 그와는 거리가 먼 자잘한 이야기도 놓치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이 점차 마실을 줄이고 있음에도 눈길을 보내곤 한다. 마을에 신작로가 난 다음 웃마을 아랫마을 간 협력 체제가 예전 같지 않음에도 주목한다. 청소년이 온라인 게임에 열중하면 나중 그들이 정치 제도에 어떤 태도를 보일까도 연구과제로 삼는다. 최근 들어서는 사회과학이 오히려 미시적인 주제에 더 열중한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회과학의 오지랖이 그 만큼 넓어졌고 대중의 일상에 가까이 가려는 노력을 벌이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회과학의 새로운 풍경 속에서 미국의 사회학자 퍼트남이 재미난 질문을 하나 던진다. 대중의 일상에 관한 것이었다. ‘왜 미국의 중산층이 친구들을 만나 세상 이야기를 나누던 일을 과거보다 줄였을까’라고 물었다. 그가 주목한 공간은 볼링장이었다. 과거 미국 시민들은 동네 어귀에 있는 볼링에 저녁마다 모여 들었다. 맥주를 마시며 담소도 나누고, 살림살이도 이야기하곤 했다. 새로 길이 나면서 동네에 미칠 영향이라든지, 동네 고등학교 육성에 대한 문제도 나누었다. 소위 공적 의제를 서로 편하게 주고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퍼트남이 질문했듯이 언젠가부터 볼링장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줄기 시작했다. 볼링장을 대신하는 논의 공간이 새롭게 생기지도 않았다.
볼링장 가는 사람 수의 감소에 대해서는 의외로 간단한 답을 전했다. 대중이 점차 주변과 멀어지는 개인화를 선호해갔다는 결론이다. 집 바깥을 나서기를 꺼리게 만드는 데는 텔레비전이 한 몫을 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대중매체는 사람들을 집안에 더욱 붙들어 매고, 바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막는다. 발이 묶인 대중은 공적 의제를 이웃과 토론할 기회를 더욱 적게 갖게 된다. 심지어 이웃을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도 허다해 공동체 생활이 망가지기에 까지 이른다. 텔레비전이 너무 재미있어서 더 많은 시청을 하게 한다면 공동체는 파괴될 거라는 전망조차 가능해진다.
사회과학은 인간이 사회적 주체가 되는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러므로 그 일을 해내는 공적 공간을 소중히 여긴다. 사회를 사회적이게 만들던 공적 공간의 실종을 사회과학은 늘 아쉽게 여기고, 그를 되살려놓을 방도를 고민한다. 공적인 논의가 이뤄지는 볼링장의 상실은 퍼트남과 같은 사회과학자에겐 심각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대중매체가 개인화를 조장해 볼링장에 사람이 모여들지 않게 만든다면 당연히 그를 대체할 수단을 강구한다. 인터넷을 공론장으로 규정하고 그에 큰 기대를 했던 것도 그런 배경 탓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이웃과 공동체 사안을 논의하는 일이 늘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불행히도 인터넷 공간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사회과학자들의 실망이 점차 커지고 있음은 인터넷 공간에 대한 연구 전반에서 읽을 수 있다. 이젠 기대보다 우려의 목소리가 더 커 보인다. 그런 와중에 새로운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이 트위터였다. 그곳에선 익명에 빠지지 않은 주체들이 다양한 공적 주제를 놓고 주도자와 비주도자 간 큰 구분 없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있었다. 선거 시기엔 각 지역 사안을 놓고 가장 적합한 후보를 소개하는 일도 해냈다는 보고도 있었다. 볼링 핀이 넘어지는 소리를 들을 순 없지만 동네 주민들이 밤낮없이 어슬렁거리며 동네 이야기로 수군대는 공간으로 트위터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볼링장에서의 담소와 텔레비전 시청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는 배타적 이벤트다. 그러나 트위팅은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해낼 수 있다. 지금 보고 있는 텔레비전 뉴스 내용을 트위터상 토론 주제로 올릴 수도 있다. 전철 안에서 옆 사람의 신문을 보다가 생각난 내용을 스마트폰으로 트위팅할 수 있다. 시민들의 항의성 데모에 동참해 실시간 상황을 중계할 수도 있다. 다양한 장소, 시간에서 다양한 주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트위터상 이웃과 나눌 수 있다. 진공 속 개인이 아닌 이웃 속 개인이 모인 트윗팅 공간이기에 사회과학자들은 그에 SNS( Social Network Service)란 이름을 붙였다. 사회적 매체라는 위상을 부여한 셈이다.
최근 MBC, KBS 노조의 파업에 대해 기존 대중매체들은 침묵을 지켰다. 양 사의 노조원들은 파업하는 이유를 알릴 수 있는 수단을 갖지 못했다. 그 와중에 트위터는 획기적인 수단으로 등장했다. 실시간으로 노조 활동, 성명서, 기자회견, 이벤트는 트위터 공간에 올라왔다. 시민들은 호응, 지지 혹은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여의도 한 쪽에서만 일어나는 방송사건이 아닌 한국 사회의 소통 문제로까지 의제화시켰다. 그러자 텔레비전이 트위터에 주목하고 그 내용을 올리기 시작했다. 트위터가 텔레비전을 부축해 일으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고 보면 트위터라는 매체는 정의하기가 사납다. 기존 매체와 경합하진 않지만 기득권은 위협한다. 특별히 참여를 독촉하진 않지만 자발적이고 강한 참여로 이끈다. 선동자가 있진 않지만 대체로 의견을 수렴해간다. 훼방꾼을 강하게 징벌하지 않되 제한하는 보이지 않는 룰을 작동시킨다. 그런 묘한 성격 탓에 지금까지의 매체에서 보지 못했던 매력을 참여자들이 체험한다. 트위터가 강한 중독성을 띠는 이유다. 헐렁헐렁하게 노는 듯 보여도 웬만한 공적 의제를 다 다루고, 깔끔하게 의견까지 형성해갈 정도로 적당히 규율이 잡혀 있다. 중립성 운위하며 위장하는 기존 매체에 비하면 솔직함의 매력까지 풍긴다.
사회적 소통과 연관된 방송인들은 언제든 볼링장을 드나들며 세상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볼링장을 드나드는 발길이 준다 해도 방송인들은 그 발길을 끊을 수는 없다 (운명이다). 마침 트위터라는 새로운 볼링장이 세상사는 이야기를 펴고 있다한다. 더운 여름날 반바지에 샌들 차림으로 볼링장 방문하는 기분으로 그곳으로 한 걸음하면 어떨까? 이제 100만 가입자를 넘겼단다. 100만 명이 왁자지껄한 거대한 볼링장으로 여러분을 감히 초대해본다.
원용진 : 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트윗터 ID, @woo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