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가 콘텐츠 시장에 미치는 영향

[기고] 한미 FTA가 콘텐츠 시장에 미치는 영향

(방송기술저널) 2015315일부터 한미자유무역협정(한미 FTA)의 방송 부문에 대한 양허가 적용됐다. 한미 FTA2012313일에 발효됐지만 방송 부문의 경우 적용시점을 3년 이후로 미뤘다. 이에 따라 오는 315일부터는 미국 기업이 100% 지분을 가지고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를 운영할 수 있다. 현재 미국의 미디어 기업은 영상물의 판권을 판매하거나 국내 기업과 합작 형태로 국내 시장에 진출하고 있지만 이제부터는 단독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보도, 종편, 홈쇼핑 PP에 대한 외국인 투자 제한은 현재와 같이 유지된다. PP의 국내 제작 영화 쿼터가 25%에서 20%로 완화됐고, 국내 제작 애니메이션의 쿼터도 35%에서 30%로 완화돼 미국의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현재보다 더 많이 편성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수입 방송물에 대한 1개 국가 쿼터 제한도 현재의 60%에서 80%로 완화돼 미국의 영화, 애니메이션, 대중음악을 더 많이 편성할 수 있게 됐다.

한미 FTA 체결 당시에는 미국 방송 시장의 규모가 한국의 30배에 이르고 미국 방송물이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국내 방송 시장이 개방될 경우 미국 미디어 기업이 설립한 PP들이 콘텐츠의 시장 유통을 좌지우지해 우리의 방송 시장이 고사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이 고조됐다. 또 미국은 미국 문화의 세계 산업화를 목표로 자국 내에서는 미디어 기업 간의 인수합병을 호의적으로 인정해 거대 자본력을 가진 미디어그룹을 탄생시키면서도 대외적으로는 공정경쟁을 위한 시장개방을 요구함으로써 거대 미디어그룹들이 해외시장을 확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왔다. 이에 비해 한국은 방송 분야의 공공성 제고를 목표로 많은 규제를 두고 있어 적극적인 투자가 부족한 상황이었고 이와 더불어 지상파 방송사 중심의 구조가 지속돼 경쟁력이 낮다고 평가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방송 콘텐츠 제작자들도 소규모 자본의 영세업자들로 주로 지상파 방송사의 하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통 구조도 취약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미 FTA 체결 이후 3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약간 바뀌었다. 3년 전보다 국내 방송 시장이 다원화되고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미 FTA로 인한 방송 시장의 충격이 예상보다는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를 다시 풀어서 쓰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내 PP들이 기존 프로그램을 유통만하지 않고 프로그램을 제작해 편성하고 있다. CJ E&M계열을 포함한 복수종합유선방송사업자(MSO)계열 채널들이 더 많은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으며 4개의 종합편성채널도 추가돼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이로써 미국 미디어 기업이 한국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등 현지화할 여지가 과거에 비해서 줄어들었다. 이전에는 지상파 방송사가 제작하는 프로그램 이외에 따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SO가 거의 없었고, 소수 취향 프로그램도 국내에서는 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미디어 기업이 비집고 들어올 빈틈이 있었는데 이제 이러한 빈 공간이 메워지고 있는 것이다.

둘째 3년 전에 비해서 한국 소비자들의 미국 드라마 선호 추세가 바뀌었다. 3년 전만 해도 한국의 젊은 시청자들이 미국 드라마인 <프리즌 브레이크>, <24>, <CSI>에 열광했지만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 드라마를 보더라도 실시간 채널보다는 주문형 비디오(VOD), , 애플리케이션 등을 이용하게 됨에 따라서 PP의 편성에서 미국 드라마의 비중이 과거에 비해서 감소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로 인한 PP시장 개방과 국산 쿼터의 완화로 PP 업계에서는 어느 정도 변화가 예상된다. 미국 미디어 기업은 현재의 판권 판매나 합작 투자로 많은 이점을 누리고 있다. 미국 미디어 기업이 판권을 판매할 경우에 투자로 인한 위험이 없어지는 이점이 있고, 합작 투자의 경우에는 채널 론칭과 광고 판매에서 한국 측 파트너 덕을 보고 있다. 하지만 한미 FTA 발효 이후에는 이러한 사업 모델에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장기적으로 미국 영상물을 주로 편성하는 채널들을 미국 미디어 기업이 직접 운영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타임워너, 바이어컴, 디즈니, 뉴스코퍼레이션, 디스커버리, 소니 등 미국 미디어 기업은 많은 채널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이 보유한 채널 중 한국에 약 20개의 채널이 이미 진입해 있고, 추가로 더 많은 채널이 진입할 것이다. 미국 영상물을 주로 편성하는 한국의 영화,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채널들은 미국 채널과의 경쟁에서 뒤져서 위축되거나 없어질 수도 있다. 미국 미디어 기업이 자사 계열 채널에 양질의 프로그램을 우선적으로 공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의 지상파 방송사가 자사 계열 PP에 인기 프로그램을 우선 공급하는 것과 같다.

예전보다는 못하지만 국내 복수방송채널사용사업자(MPP)들은 영화와 애니메이션 채널에서 큰 수익을 내고 있고, 이들 채널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으로 국산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 PP들이 프로그램을 제작할 경우에 이익을 내는 경우보다 손실을 보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PP의 입장에서 프로그램 제작은 장기적인 측면에서 경쟁력 강화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해외 스포츠 프로그램을 주로 편성하고 있는 스포츠 채널의 경우에도 해외 경기의 중계권을 구매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이러한 시나리오가 실제로 이뤄진다면 한미 FTA로 한국 MPP의 수익이 감소하게 되고 이로 인해서 프로그램의 제작이 감소할 수도 있다.

한국의 MPP들이 미국의 거대 미디어 기업과 경쟁하고 공존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했다. 이에 잘 대응할 경우 한국 MPP들의 역량이 한 단계 더 높아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국내 시장의 많은 부분을 미국 기업에 내주게 될 것이다. 한미 FTA가 체결된 이후 정부는 PP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계획을 수차례 수립하였지만, PP의 경쟁력 강화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정책이 무엇일까? 외형적으로는 일산에 제작지원센터인 빛마루를 건립하여 운영 중이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이번 한미 FTA를 계기로 PP들이 양질의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편성하고, 시청자들이 이를 보는 대가를 적절히 지불하고, 플랫폼이 적정한 채널 송출료를 PP에 지불하고, 다시 PP가 양질의 프로그램을 제작 편성하는 선순환 사이클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정부는 20147월에 ‘PP산업 발전 전략을 마련하여 발표한 바 있다. 이 정책에서도 PP 산업의 선순환적 생태계 조성이 우선적으로 제시돼 있다. 그 다음으로 PP 채널의 다양성 공공성 제고와 PP 산업의 국내외 경쟁력 확보가 제시돼 있다. 이 정책 보고서에 제시된 내용이 차근차근 진행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