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
김혁(방송협회 방통융합특위 정책실장)
첫째, 의무재송신 제도의 목적과 성격 문제다.
의무재송신의 “의무”는 플랫폼 사업자의 것이다. 케이블SO와 같은 플랫폼 사업자들에게 모든 것을 맡겼을 때, 영리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제공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그 경우 국민들의 알 권리나 여론 다양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는 채널을 정해서 이 채널들만은 (플랫폼 사업자의 이해관계를 떠나) 꼭 시청자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의무적 재송신 채널 정책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의무재송신 제도는 지상파 재송신을 당사자 허락 없이 할 수 있는 수단인 양 왜곡되어 사용되어 왔다. 예를 들어 2000년 방송법에서는 KBS 2TV도 의무재송신 대상 채널이었다. 그러나 위성방송이 KBS 2TV를 재송신하면 빠르게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을 두려워한 케이블 진영에서 국회 등을 적극 동원, KBS 반발에도 불구하고 2002년 4월 20일 KBS 2TV를 의무재송신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송법 개정을 하게 된다. 위성DMB 사업자 역시 이러한 접근을 한 바 있는데, 당초 채널이 일반 위성방송에 비해 적다는 특성에 근거해서 의무재송신 적용 대상이 아닌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가 지상파 재송신 계약 합의에 도달하지 못해 사업 확대에 어려움을 겪자 다시 KBS 1TV 만은 의무재송신화 해야 한다는 방송법 개정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번 케이블방송사의 제도개선 요구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다 보니 당초 의무재송신 제도의 목적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지금 케이블방송사들이 지상파채널 중 KBS 2, MBC, SBS TV 채널을 재송신 하지 않으려 하는가? 그래서 시청자들의 알 권리나 여론 다양성이 훼손되고 있는가? 천만에! 오히려 반대 아닌가? 방송법에 정하지 않은 모든 지상파방송 채널까지 무단 재송신하고 있고 지상파방송사들이 불법 재송신을 중단하라고 요구하자 계속 재송신 하기 위해 아예 의무재송신 채널로 정해달라고 제도개선을 요구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의무재송신 제도는 지금의 왜곡된 모습처럼 타 사업자의 콘텐츠를 무료로 사용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고 여론 다양성과 국민들의 알 권리 충족을 위한 플랫폼 사업자의 의무 부과 제도다. 그래서 대상채널의 선정은 그 도입 목적에 맞아야 하며 단순히 의무재송신 제도를 통해 현재의 재송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경우 결국은 더 큰 난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콘텐츠 산업은 또 어찌 할 것인가?
지상파를 모두 혹은 대부분 의무재송신 대상채널로 정해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른 산업 측면인 콘텐츠 산업에 대한 보완정책도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갈수록 광고수익이 줄어들어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는 지상파방송사들이 자신들의 콘텐츠를 이용, ‘One-Source Multi-Use’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지상파방송을 모두 의무재송신 대상 채널로 정해 누구나 동시재송신 하도록 허용하게 되면 지상파방송의 쇠락은 불을 보듯 빤하고 콘텐츠 재생산 기반이 붕괴되어 결과적으로는 시청자인 국민들의 문화 향유권이 박탈된다. 2차 3차 유통시장을 없애버리면 콘텐츠 사업자는 첫 번째 유통에서 모든 수익을 확보해야 하니 지상파방송이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광고로 도배질을 할 수도 없고 지상파방송 자체를 유료화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또 권리의 행사 기회 상실에 대한 부작용도 심각함을 깨달아야 한다. 예를 들어 월드컵 중계권 구매과정을 살펴보자. 월드컵처럼 규모가 큰 중계권은 갈수록 그 판매대상을 세분화해 총액을 증가시키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지상파, 케이블, IPTV, 위성방송, 모바일 방송은 물론이고 응원전도 별도 권리로 나눠 판매하고 있음은 이미 우리가 지난 남아공 월드컵에서 경험한 바 있다. 그런데 만약 지상파채널 전체가 의무재송신 채널이 된다면 그 말인 즉, 모든 매체에 동시재송신 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이른바 지상파방송사 외 2, 3차 시장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판매자가 이러한 시장구획을 인정하고 들지도 의문이거니와 인정한다 해도 그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1차 구매자이자 최종 구매자인 지상파방송사에게 원하는 중계방송 판매수익 모두를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상파방송사들은 그런 요구에 응할 수 없다. 광고재원은 한정되어 있고 2, 3차 유통기회는 없어 손해 볼 것이 불을 보듯 뻔 하기 때문이다. 결국 IB 스포츠 등 제3자에게 그 중계권이 넘어갈 것인데 그들 역시 보편적 시청권 조항 때문에 지상파에게 제공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손해 볼 수도 없는 난처함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은 분화되어 나가는 매체시장의 특징을 무시하고 의무재송신 제도 하나만 고집하는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의무재송신 제도 안에 시청점유율 합이 50%를 넘는 지상파방송사들이 다 들어가 있는 상황에서 해외 콘텐츠 사업자들이 택할 방법은 지상파방송사에 모든 권리를 사가라고 요구하는 뿐이며 그 결과는 아무도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대형 경기 중계권을 사오지 못하는 ‘문화 고립국’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근간인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와 관계다.
지상파방송사는 그 공익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국가나 공공조직은 아니다. 부여된 공적 책무를 다 하고 있는 것과 별개로 엄연한 개별 사업자이자 기업이다. MBC나 SBS의 책상이나 의자를 아무나 가져다 쓸 수 없듯 해당 방송사의 가장 귀한 자산인 콘텐츠를 허락 없이 이용할 수 없다. 만약 이러한 지상파방송사들의 권리 일부(동시중계방송권)를 법을 개정해서 제한할 경우 당연히 법 개정의 정당성이 문제될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권리의 제한의 목적이 특정 사업자 진영을 위한 것이라면 지상파방송사들 역시 권리 회복을 위해 법적 다툼을 피할 수 없게 되는 점이다. 만약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대한민국에서 어느 것도 문제될 리 없다. 문제가 되면 법을 고쳐 해결하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재송신 문제를 쉽게 해결하겠다고 의무재송신 대상채널을 확대하는 행정행위가 작동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조처가 헌법이 보장한 기본 권리를 해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의 이유들을 고려할 때 지금 문제가 된다 해서 해당 지상파방송 채널들을 모두 의무재송신 대상채널로 확대하는 것은 가장 쉬운 방안이되 훨씬 더 많은 문제를 불러오는 가장 어리석은 방안이다.
만약 방통위가 현재의 기조를 버리지 않고 밀어붙이기로 간다면, 지상파 입장에서는 어차피 다 빼앗길 상황인데 그런 판에 이름까지 얹어 둘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지금의 제도가 문제 없는데도 특정 사업자만을 위해 제도를 개선하겠다는 움직임에 함께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협상 결렬과 제도개선 전담반 불참을 선언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