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던 지상파 재송신 대가의 갈등은 케이블 방송사업자에 의해 2012년 이후 재송신 제도 전반에 대한 정책적 재검토가 요구되면서 새로운 논란이 재개됐다. 제1라운드의 갈등은 과연 지상파 방송을 동시 재송신하는 것에 대해서 지상파 방송사가 유료 매체에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법률적으로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것이던 반면, 제2라운드에서는 지상파가 재송신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면 과연 그 정확한 대가를 어떻게 산정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비유해보자면, 1라운드의 분쟁이 재송신 대가에 대한 존재론적 판단이었던 반면에, 제2라운드에는 재송신 대가 산정의 방법론에 대한 논란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제2라운드 논란의 한 가운데는 방송법 개정안(방송통신이용자 보호법)이 놓여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2014년 11월 18일 전체회의를 열어 재송신 제도 개선을 위한 <방송법> 개정안을 의결한 바 있다. 해당 방송법 개정안에는 방통위가 재송신 대가를 둘러싼 분쟁에 대해서 ‘직권조정’, ‘재정제도’, ‘방송유지 및 재개명령권’을 도입하기 위한 내용이 포함돼있다. 방통위는 지상파 방송사와 유료 매체의 분쟁이 심화해 방송 중단 등의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해 시청자의 권익을 보호하겠다는 목적으로 해당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 이에 대한 우려도 더욱 커지고 있다. 해당 개정안을 둘러싼 논쟁의 구도를 요약해 보자면, 케이블 방송사를 포함한 유료 매체들은 방통위의 적극적 개입을 요구하는 한편 지상파 방송사는 개입의 부당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모습이다.
2. 지상파 재전송과 필수설비 이론
방통위의 방송법 개정안에서 지상파 재전송에 대한 직접적 개입의 이론적 근거를 살펴보자면, 이는 필수재 또는 필수설비에 대한 경제학적 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필수설비(essential facility) 이론은 공정거래와 관련해 규제 또는 시장 개입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이론이다. 사실 필수설비에 대한 개념은 나라마다 법 원리의 특성으로 인해 차이를 갖고 있으나, 대체로 필수설비(essential facility)라 함은 “그에 대한 접근(access) 없이는 어떠한 경쟁기업도 그 기업의 소비자들에게 서비스(또는 재화)를 제공할 수 없는 설비(facility or infrastructure)”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김희수 외, 2001, p. 41). 이러한 필수설비의 성격으로 필수설비를 독점적으로 보유한 사업자가 경쟁사업자에게 적정한 가격으로 제공하지 않을 경우, 경쟁사업자가 시장에 진입할 수 없고 필수설비를 독점적으로 보유하는 사업자가 시장에 대한 독점적 지배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김희경, 차영란, 2011; 한철 2002). 필수설비의 개념은 처음에는 철도(미 정부 vs TRA) 설비에 대한 분쟁에서 출발해 전력, 도로, 항만, 통신 등 주로 네트워크 사업 분야에 적용됐으나, 점차 범위를 넓혀가며 최근에는 MS의 Windows, 금융 산업의 ATM 등 정보기술 시스템까지 적용되고 있다.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고 있지만, 필수설비 이론이 적용되는 것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질서의 기본이 되는 사적자치의 원칙과 충돌하는 것이므로 이는 적용요건이 충족되는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신중하게 적용돼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한철, 2002).
이러한 배경 속에서 2000년대 중반 이후 융합 환경 속에서 방송 산업의 규제 방향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지상파 방송을 방송 산업의 필수설비로서의 성격을 검토해야 한다는 일부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예, 김도연 외, 2006; 문기탁, 2009). 요약하자면, 지상파 방송이 유료 매체들을 통해 전달될 때, 유료 매체들은 IPTV, 위성방송, 케이블 방송 등 복수의 유료 매체 간의 시장 경쟁을 통해서 소비자의 선택을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지상파 방송은 자체의 완결된 상품이 아니라 케이블 방송 등 유료 매체의 상품을 구성하는 중간재의 성격을 갖게 되고, 중간재 중에서도 완성품을 구성하는 데 빠질 수 없는 필수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지상파 방송이 유료 매체라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필수재 또는 필수설비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문기탁, 2009).
하지만, 이러한 견해가 많은 동의를 얻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기본적으로 필수설비 이론은 지적 재산권의 개념과 충돌되는 성격을 갖고 있기에, 방송 콘텐츠에 적용이 쉽지 않다. 지적 생산물의 개발을 유인하기 위해서 특허권, 저작권 등 지적 재산권을 보호하는 법 목적에 비춰 볼 때, 필수설비 이론이 지적생산물에 대해서 적용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에 대해서 충분히 동의할만한 답은 아직까지 찾기 어려운 모습이다. 요약하자면, 방송 산업의 특성상 콘텐츠 사업자의 시장 지배력에 대한 위험보다는 플랫폼 사업자의 콘텐츠 이용에 대한 무임승차 위험성이 크고, 이원적 시장구조와 B2B 중심의 시장 구조의 특성상 콘텐츠 사업자가 플랫폼 사업자에 대한 절대적 지배력을 갖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과 국내 공정거래법상에서 필수설비 판단에 적용되는 필수성, 대체 불가능성, 독점력의 원칙에 비춰 보아도 지상파 방송을 필수설비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먼저, 필수성이란 개념은 매우 추상적이지만, 일반적으로 해당 설비를 제공받지 못할 경우 시장 내에서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의 필수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철도 사업의 경우 철로에 접근이 불가능한 경우에 철도 사업을 원천적으로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방송 산업에서 지상파 방송이 철도 사업에서의 철도에 비할 정도의 필수성을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는 두 번째 원칙인 대체 불가능성과도 연관되는데, 방송 산업에서 지상파 방송은 유일한 콘텐츠 제공사업자가 아니며, 콘텐츠 시장 내에서의 시장영향력도 점차 감소하는 추세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시장지배력에서도 지상파 방송을 지배적 사업자로 간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만약 방송 콘텐츠가 필수설비로 판단되기 위해서는 상류 사업자인 콘텐츠 제공업자가 하류 사업(유료 플랫폼)에서도 독점력(시장지배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즉, 방송 사업자가 콘텐츠 시장과 플랫폼 시장에 대해서 수직적 결합을 통해 시장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갖고 있어서 콘텐츠를 통해 플랫폼 사업의 경쟁을 가로막는 행위를 하고 있다면, 이에 대해서는 콘텐츠를 필수설비로 간주할 수 있는 요인 중 하나가 충족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국내의 방송 플랫폼 현황을 보면, 지상파와 SO 사업의 겸영은 금지돼 있고 지상파의 플랫폼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사라진 상황이다. 반면, 케이블, IPTV, 위성뿐만 아니라 각종 온라인 사업자까지 포함해 플랫폼 사업은 이미 충분할 정도로 다양한 사업자가 충분한 경쟁을 하고 있다. 지상파 사업자가 특정한 플랫폼 사업자에게 콘텐츠 거래를 거절한다고 해도 이는 지상파 사업자가 플랫폼 시장에서의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거나 경쟁을 저해하기 위함으로 판단할 수 없는 조건인 것이다. 즉, 지상파는 플랫폼 사업의 시장 지배적 사업자가 아니며, 이는 자연스레 방송 시장 전반에서도 독점력을 갖춘 사업자로 볼 수 없는 것이다.
3. 결론: 시장 규제의 원칙과 방향
국내에서 추진하고 있는 재송신 관련 개정안의 핵심은 시청자의 이익 침해가 우려되는 경우 직권조정을 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고, 국민적 관심행사에 대해서 방통위가 준사법적 절차를 거쳐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재정제도를 신설하고, 방송중단이 임박하는 경우 방송을 한시적으로 유지하게 하는 유지, 재개 명령 제도를 신설하는 것이다. 이는 시장 거래의 공정성에 대한 사후적 판단 기준을 제시하는 것과 별개로, 직접적인 시장 개입의 성격을 갖게 된다. 이러한 직접적 개입은 블랙아웃이 빈번함에도 시장 개입을 최소화하고 있는 미국의 정책과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이다.
개정안의 몇 가지 문제점을 요약해보면, 먼저 직권조정 및 재정제도의 목표는 필수설비를 하류 사업자에게 합리적 가격에 제공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므로, 이는 합리적 가격 산정이 가능하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런데 방송 콘텐츠는 다른 제조업 또는 설비업 분야와 달리 원가를 계산하기 어려운 속성이 있다. 제작 원가에 의한 가격 산정이 정확하지 않고 또한 제작 원가의 개념이 시장에서 잘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규제기관이 방송 콘텐츠의 ‘합리적 가격’을 산정하는 것은 시장 참여자의 동의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방송 콘텐츠가 창의적 지식 산업이기 때문에 그것의 고유한 재산적, 저작권적 가치를 강제로 거래하도록 규제하는 것은 위헌 논란을 제기할 수 있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다음으로, 방송 콘텐츠를 필수설비 거래거절의 개념으로 직접 규제하는 것이 국내 방송 콘텐츠 산업의 구조적 문제를 증폭시킬 우려도 있다. 이는 필수설비 개념에 기반을 둔 규제의 일반적 부작용으로 많이 지적되는 것인데, 방송 외의 산업 분야에서도 필수설비 개념을 통한 규제가 적용될 때 해당 산업 분야의 기반 설비에 대한 투자를 약화해서 장기적으로 해당 분야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문기탁, 2009; 김희경 외, 2011). 이러한 관점에 기반을 둬 방송 유지 및 재개의 조항이 갖는 영향을 예측해보면, 이는 국내 방송 산업의 득보다는 많은 우려를 갖게 한다. 끝으로, 이익 형량의 원칙에서도 과연 현재 지상파 방송과 유료 매체의 재송신 갈등에서 발생하는 피해가 현저하고 개입이 필요할 정도로 시급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실제로 국내 법원의 판결에서도 HD 송출이 중단됐지만 SD 방송과 아날로그 방송의 송출을 통해 피해가 작았다고 판단해, 해당 사안을 “수인해야 할 한도 내에 있다”고 판단한 바 있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13. 7. 19 선고, 2012가소567518). 이러한 판단에 비춰 보자면, 최근의 유료방송에서 방송 중단의 위험을 부각하고 시청자 권익의 확보를 주장하는 것은 규제기관의 적극적 개입을 유도하는 수사적 표현으로 이해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올바른 시장에 대한 규제는 시장에 대한 직접적 개입이 아닌 시장 내에 사업자들의 거래가 공정하게 이뤄질수록 있도록 하는 시장 감시와 감독이라 생각한다. 결국, 재전송의 문제에서도 시장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시장 사업자들의 몫일 것이다. 방송통신의 기술 발전 속에서 현재의 사업자들 외에도 새로운 사업자들은 계속 등장할 것이고, 그 속에서 시장 획정은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그 가운데, 규제기관이 사업자들의 관계를 사사건건 조정하고 개입하면서 공정성을 유지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목표이며 바람직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미 FCC에서 시장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면서도 시장 획정을 바탕으로 공동협상(담합)을 제한하는 형태로 접근하는 것은 참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이성엽, 2015; 시장획정과 관련하여 남재현, 이상규 2014). 즉, 직접적인 시장 사업자의 활동 규제가 아닌, 적절한 시장획정과 일반적인 시장 경쟁 원칙에 기반을 둔 공정거래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시장에 대한 직접적 개입보다는 시장 역동성에 기반을 둔 적절한 시장 획정(남재현, 이상규, 2014)과 그에 따른 일반적인 공정거래의 원칙으로 접근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참고문헌>
김희경, 차영란(2011). 공정거래법상 필수설비의 거래거절: 방송콘텐츠의 적용을 중심으로.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11(10), pp. 115-126.
김희수, 김형찬, 변정욱, 곽정호, 오기환(2001). 시장지배적 사업자의 필수설비 규제에 대한 법경제학적 접근. KISDI 연구보고서.
남재현, 이상규(2014). 유료방송채널 거래시장 획정: 지상파 재전송 채널을 중심으로. 정보통신정책연구, 21(3). pp. 23-52.
문기탁(2009). 필수설비이론의 방송콘텐츠에 대한 적용가능성에 대한 연구: 방송의 공익성과 관련하여. 외법논집, 33 (3), pp. 677-707.
이성엽 (2015). 지상파방송 재송신 관련 입법의 쟁점 및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 방송유지, 재개명령권, 직권조정, 재정제도를 중심으로. 경제규제와 법, 8(1), pp. 128-145.
한 철(2002). 공정거래법상의 필수설비원리. 경영법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