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철, ‘김미화’라는 경쟁력을 버리다

[기고] 김재철, ‘김미화’라는 경쟁력을 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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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민 시사평론가

어느 방송이든 MC 진퇴는 사장 승인을 득해야 한다. 그러나 사장 결정만으로 그것이 결정될 때에는 뒤탈이 생기기 십상이다.
코미디언 김미화 씨가 사퇴했다. MBC라디오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후임 진행자에서 말이다. 자진(自進)의 형식이다. MBC 측은 “김미화 씨가 성실하게 프로그램을 잘 진행해 온 데 대해 감사 한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러나 사태의 전말을 아는 사람들은 이를 무난한 교체로 여기지 않는다. ‘전과’가 있었다. 드라마 ‘폭풍의 연인’을 일방적으로 조기 종영시켰다. ‘우리들의 일밤: 나는 가수다’는 직접 나서 PD를 교체해 버렸다. ‘PD수첩’은 핵심PD들을 빼 버리더니 아이템에 노골적으로 개입했다. 누가? 김재철 사장을 필두로 한 경영진이 말이다. 이쯤 되면 일선 PD를 믿을 수 없다는 회사 수뇌부의 결연한 문제의식이 확인된다.
문자 쓸 일이 거의 없는 단순 노무현장에서도 통상 사람을 내 쫓을 때에는 ‘흠 잡기’가 선행돼야 한다. MBC가 김미화 씨를 꼭 퇴출하려 했다면, KBS처럼 ‘발음과 호흡이 부적절했다’는 구실이라도 만들었어야 했다. 그러나 김미화 씨와 만났다는 라디오본부 고위 관계자는 “이번은 안 되겠다”는 입장을 짧게 밝혔을 뿐이라고 한다. 사실 김미화 씨의 판단은 아쉽다. 탄압받더라도 불의에 맞서 결연히 싸우는 모습을 보였으면 했다. 그러나 김미화 씨의 깊은 사려도 헤아리게 된다. 터무니없는 ‘친노’, ‘선동꾼’으로 매도한 이들에게 “나는 남과 싸울 일 없는 코미디언일 뿐”이라는 아주 명징한 일침을 가했기에 말이다. 김미화 씨를 ‘마녀사냥’한 주인공들, 역사로부터 ‘코미디언을 두려워하며 내쫓은 이들’로 규정될 것이다.
그나저나 MBC라디오가 걱정이다. 광고수입, 꾸준한 2000억대. 청취율, 줄곧 1위. 이건 거의 전설이기에 그렇다. 추격하는 경쟁사, 1990년대 MBC라디오처럼 표준FM 서비스를 개시했다. MBC에서 하차한 MC를 그대로 모셔와 동시간대에 편성하기도 했다. 때론 차별화가 길이겠거니 해서 색다른 포맷을 시도하고, 새로운 소구 층을 겨냥했다. 그러나 지표는 미동도 없었다.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 한 유명 트로트 가수는 당시 10%대의 청취율을 보이던 MBC라디오를 지목하며 “MBC에 나가는 것은 1%대의 A방송 10번 출연하는 것과 같다”는 말을 했다. 지금 3사 중 MBC만이 ‘라디오본부’가 존속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매체 파워의 덕이다.
라디오PD 출신에, 언론학 전공자인 나로서도 MBC라디오의 부동의 ‘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다년간 살핀 끝에 내린 결론은 ‘탈피’이었다. 포맷 다변화, 새 인물 집착, 고담준론(高談峻論)식 저널리즘을 거역했다는 것이다. 우선 첫째 ‘포맷 다변화 탈피’. MBC라디오 대부분의 주요 프로그램은 ‘편지쇼’ 형식이다. ‘양희은 강석우의 여성시대’,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 ‘조영남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시대’가 그렇다. 인격수양이 안 된 몇몇 아이돌의 신변잡기 대신 평범한 이웃의 삶을 채운다. 이 리얼리티는 감동 또 웃음이라는 공감을 수반한다.
둘째, ‘새 인물 집착 탈피’. 묵히면 묵힐수록 배가되는 게 장맛이듯, 안착한 MC를 본인이 사의를 표하기 전까지 롱런케 했다. 적어도 김재철 사장 직전까지는. 손석희, 양희은, 강석우, 강석, 김혜영, 김흥국, 조영남, 최유라, 김미화, 최양락, 박경림 등은 MBC라디오가 MC를 소모품 정도로 여겼다면 보유하기 힘들 강력한 맨 파워이다. 실은 이런 노하우를 정상급 음악FM SBS 파워FM도 원용한 듯하다. 이숙영, 김창완, 최화정, 김창렬, 박소현의 멋진 지구전과 높은 청취율이 근거다.
셋째, ‘고담준론식 저널리즘 탈피’. MBC라디오의 양대 시사 프로그램은 2000년 ‘손석희의 시선집중’, 2002년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이다. ‘시선집중’은 뉴스메이커로서,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은 거대담론의 연성적 접근자로서 채널 내 적절한 역할분담을 통해 각자의 존재가치를 뿌리내렸다. 과거 특권층이 주물렀던 시대적 논제를 서민의 술상에 올린 지대한 공로가 이 두 프로그램에게 있다. 구체적 비결은? 쉽다. 재미있다. 때론 분노를 발산케 한다. 드라마 못지않은 흥미를 자아낸다. MBC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은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이 한 때 표방했던 캐치프레이즈 ‘153cm 아줌마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에 그 진정성이 있다.
2002년에 방송을 시작했으니 1년만 더 하면 방송 출범 10년이 되는 관록의 MC를 뚜렷한 하자 없이 사실상 교체했다. ‘김미화 퇴출’은 따라서 MBC라디오 스스로의 경쟁력을 실추하는 것이라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김미화 씨의 후임을 두고도 ‘김재철 사장의 신임’이 변수가 되는 형편이다. 전직 아나운서 출신의 B 모 씨가 운위됐던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노조는 그 MC석을 ‘소박하고 수수한 이미지의 진행자’의 자리라고 못 박고 있다. 그러나 메아리 없는 외침이다.
양식 있는 방송사 CEO라면 제작 실무진으로 하여금 프로그램에 흥과 혼이 샘솟도록 뒷받침해야 마땅하다. 멋대로 자르고, 지르는 김재철 사장의 행태. 본인이 이끄는 조직과 구성원에 대한 자해로밖에 볼 수 없다. 코미디언은 비극의 주인공이, 방송사 사장은 희극의 주인공이 되는 세상은 정상이 아니다. 이탈한 MBC라디오의 궤도 복귀, 언제쯤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