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기원

[칼럼] 종이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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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기술저널=SBS 뉴미디어개발팀 부국장 오건식] 지난 4월 인터넷 은행인 케이뱅크에 이어 7월에는 카카오뱅크가 출범했다. 스마트폰을 플랫폼으로 하는 은행답게 청년층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카카오뱅크는 단기간에 100만 계좌 개설을 넘어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대출이 간편해서라는 의견도 있지만, 시중은행은 1년에 많아야 신규 계좌 개설 수가 15만 정도라고 하니 그 기세가 놀랍다. 인터넷 은행은 기본적으로 종이 통장이 없다. 기존 시중은행도 9월 1일부터 ‘종이 통장 미발급’ 옵션을 선택하면 종이 통장 발급을 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2020년부터는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기본적으로 종이 통장 미발급이 기본 옵션이 될 것 같다. 그러니 2020년 이후에 종이 통장을 받으려면 추가 비용을 부담해야 할 것이다. 취미가 뭐냐고 물어보면 ‘독서 – 통장 읽기’라는 우스갯소리도 바야흐로 역사의 뒤안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시의 척도로 여기는 ‘내가 통장이 몇 개…’란 표현도 미래에는 민속박물관이나 가야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맞아 그래 그땐 그랬지”

과학기술정통부(줄여서 과기정통부라고 한다. 어쩐지 괴기정통부 같은 필이 든다)는 전자문서법 개정을 통해 정부 지자체나 공공 기관의 각종 고지서를 카카오톡이나 라인 같은 모바일 메신저로 받아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우선 금년 내에 자동차 정기 검사 사전 안내문을 인터넷 메신저로 발송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연간 2천만 건에 달하는 정기 검사 사전 안내문만 메신저로 바꿔도 종이, 인쇄 및 배달에 들어가는 비용 45억 원이 절약된다고 한다.

종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보편적 모바일 미디어(정확히는 미디움)다. 종이(Paper)란 단어는 이집트 나일강 유역에서 자라는 식물의 줄기인 파피루스(Papyrus)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파피루스는 허접해서 쉽게 사용하기가 힘들었으며, 지금 보는 형태의 종이는 중국 후한 시대 서기 105년 환관인 채륜에 의해 발명됐다고 한다. 그보다 약 300년 전인 한 고조 유방 때가 종이의 기원이라는 설도 있다. 그 후 인쇄술의 발달로 종이는 현재까지 수백 년 이상을 매체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종이의 지위는 디지털 Paperless 환경이 도래하면서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종이도 다윈의 ‘종의 기원’처럼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된다. ‘종의 기원’에 따르면 적응하지 못한 개체는 사라진다. 속성상 종이도 더 이상의 적응은 힘들 것 같다.

하지만 필자는 종이란 매체가 좀 더 버텨주길 원한다. 책에서 나는 특유의 종이 냄새를 전자책인 eBook에선 느낄 수 없다. 대학교 때 학과 사무실로 배달되던 모 여대의 학생(당연히 여학생)이 보내온 학보의 감동은 지금의 이메일 따위로는 대체할 수가 없다. 같은 과 학생들에게 뻐기고자 일부러 며칠씩과 사무실 우편함에 묵혀두던 센스를 부릴 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리고 예로부터 책 도둑은 일반 잡범과는 궤를 달리해서 취급해 줬다. 개인적 경험이지만 영화로 만든 ‘책도둑(2013)’과 소설 ‘책도둑(2005)’은 감동의 무게가 다르다. 기타 수만 가지의 이유로 종이가 지속되기를 기원(祈願)한다. ‘종이 기원’이란 단어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패러디 한 말장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언제부터인가 말장난을 잘 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말(馬)장난 치다가 빵에 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나서부터는.

공영방송사 2곳이 파업 중이다. 해당 방송사의 방송기술 엔지니어들도 당근 동참하고 있다. 방송사 직원들은 경영진 입맛에 안 맞는다고 바로 패턴을 바꿀 수 있는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다. 스케이트장 관리는 매우 위험하고 전문적 분야다. 안전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이상의 스케이팅 능력이 있어야 하고, 빙질을 고르게 하는 것은 월드컵경기장 잔디를 보수하는 것 이상으로 어렵다. 아나운서나 PD가 쉽게 전업할 수 있는 직종이 절대 아니다. 빨리 적재적소 배치가 이뤄지길 바란다.

종이는 어쩔 수 없이 아날로그 플랫폼이다. AI가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감성을 코딩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머신에게 ‘시푸르둥둥한 컬러’란 색감을 어떻게 코딩하겠는가? 감성이 곧 소통이다. 사람은 종이처럼 지나온 세월의 무게나 신념을 쉽게 바꿀 수 없다. 지금 퇴진 요구를 받고 있는 경영진도 오래전에는 지금과 다른 신념이나 행동 양식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물이 속속 나오고 있다. 본인들의 기원(紀元)을 생각했으면 한다. 기원하니까 갑자기 1990년 K 본부의 서기원 사장님 생각이 난다. 그분 덕에 경찰서에서 2박 3일을 무료로 묵었던 고마운(?) 기억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