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시간 근무제의 명암

[사설] 52시간 근무제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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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기술저널=박재현 방송기술저널 편집주간] 거의 누구나 인생에서 경험하는 학창 생활의 추억,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야간 자율학습의 경험이다. 자율학습, 말 그대로 학생이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스스로 학교에 남아서 남은 공부를 하는 것이다. 좋은 의미의 ‘자율’과 ‘학습’이 합쳐진 단어이니 참 좋은 말 같다. 그런데 학창시절을 지나온 이들에게 이 좋은 말에 대한 기억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분명 자율학습인데, 전교생이 전원 참여한다. 알아서 공부하다 가면 되는데, 교실 밖에서 무서운 선생님이 지키고 있다. 분명 개인별로 남은 공부량의 차이가 있음에도 전교생이 일사불란하게도 같은 시간에 귀가를 한다. 말만 자율이고 실제로는 ‘타율’에 의한 강요된 학습이었던 것이다.

학생들이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학교에 잡아놓기 위해 만들어졌다고도 알려진 이 제도는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문제 제기와 폐지 운동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면서 폐지와 부활을 반복하더니, 어느 때에는 자율학습의 ‘자율적 시행’이라는 이상한 형태로도 존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분명 학교별 자율적 시행임에도 없애는 학교는 없다.

‘타율’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교육 당국의 여러 가지 시도에도 효과는 없으니 이제 그 목적 달성에 가장 확실한 방법은 폐지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스스로 남아서 알아서 남은 공부를 하는 학생이 나머지 학생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후 약 4개월이 지났다. 여러 가지 우려에도 많은 긍정적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시행 전에는 일찍 퇴근하는 사람들이 눈치를 보면서 퇴근했다면, 이제는 더 일하려고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눈치가 보인다. 일을 더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마치 그 자유가 통제당함을 느끼는 상황이 된 것이다.

혹자는 이 때문에 주 52시간 근무제가 문제가 있는 제도인 양 공격하는 논리를 펼 수도 있겠다. 말은 된다. 일을 필요 이상으로 하지 않을 자유도 중요하지만, 일을 ‘더’ 할 수 있는 자유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점은 ‘더 일할’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주 52시간 근무제’ 자체가 아니라 그 제도를 있게 한 원인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노동력의 착취다. 그리고 그 착취가 힘의 논리에 의해 발생하는 불평등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제도의 시행에 의해 잃어버리는 가치보다도 그것에 의해 지킬 수 있는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2가지의 가치를 모두 지키는 방법을 아직까지 찾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의 시행이 끝이 아닌 시작인 것이다. 어렵지만 우리는 이 ‘숨 막히는’ 제도에 자유와 그 자유에 기반한 자율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 기업과 정부 및 노동자들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기업은 노동자들의 노력이 기업이 원하는 가치를 창출하는 가장 큰 요소임을 늘 명심해야 한다. 그리해 어떻게든 ‘면피’만 하려는 땜질식 처방에 그치거나 이 제도를 직원을 감시하기 위한 쓸데없는 조치들(ex. 위치 추적)을 도입하는 빌미로 삼을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일어나는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산정해 인력 보강 등 필요한 조치를 지속해서 취해 나가야 한다.

또한, 정부는 이 제도에 대한 철저한 관리 감독을 하되, 그에 만족하지 말고 현장에서 일어나는 노동의 가치를 종류별로 좀 더 세밀하게 정의해 이를 표준화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자들 스스로가 착취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늘 명심하고, 함께 일하는 동료(그들이 정규직이건, 파견직이건, 외주 인력이건, 상관이건 부하 직원이건 상관없이)의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서로 도울 수 있는 연대 의식을 발휘해야 한다. ‘너의 노동’의 가치가 곧 ‘나의 노동’의 가치임을 늘 명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