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풍경
EBS 편집위원 송주호
추석이 눈앞에 다가왔다. 특히 이번에는 추석 연휴가 화요일에서 목요일까지 한 주의 가운데에 놓이면서 이중 샌드위치로 끼인 월요일과 금요일을 여러 모로 활용할 계획을 갖고 계신 분들도 많을 것 같다. 나는 우리 가족이 손위 형제들은 모두 결혼하고 조카가 여럿 딸린 (모두 떨어져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대가족이 된 이상, 이제 추석은 꼼짝없이 집에 붙어있어야 하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한 살에서 열세 살에 이르는 넓은 스펙트럼에 분포된 조카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지금부터 내 머리 속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래도 예전처럼 먼 곳에 계시는 친지 분들을 찾아뵈어야 하는 의무감을 덜어서 어쩌면 더 편해졌다고 생각하련다.
그래도 추석이 되면 추석이기 때문에 응당 해야 하는 (예를 들면 결혼을 했다면 양가를 찾아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의례적인) 일들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끼리 모처럼의 연휴를 맞아 모임을 갖곤 했다. 특히 내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한 동호회에서는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소위 ‘번개’라고 하는) 비정기 모임을 갖는 풍습(?)이 있었다. 올해에는 토요일에 (무려 비정기가 아닌!) 정기 모임을 갖기로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휴일에 ‘할 일 없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올 해는 누가 얼굴을 보여줄 것인가?
그래도 추석 연휴 첫 날은 나에게 중요한 임무가 주어져있다. 바로 음식을 준비하는 숭고한 의식! 온 가족이 모여 송편과 각종 전을 부치는 데 동원된다. 예전에는 가족들이 다 모여서 빨리 일을 진행시킬 수 있었지만, 한 사람씩 출가를 하더니 이젠 나만 남아 예전과 같지 않은 부담을 지게 되었다. 조카들의 폭증으로 인력이 늘어나지 않았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나이 스펙트럼이 저주파 대역에 몰려있는 까닭에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 결국 음식은 많이 필요하고 일손은 줄어든 스태그플레이션이 벌어졌다. 이제는 하루 온종일 일해야만 할당량을 채울 수 있다. 올해는 제발 음식을 조금만 하기를! 하지만 스펙트럼이 고주파로 조금씩 이동하면서 당분간 스태그플레이션이 심화되리라 예상된다.
월요일 아침 출근을 하면서 본 신문에서 추석 관련 기사가 있었다. 기차표나 비행기 표는 진작 예매가 끝났을 것이고, 이제는 교통량에 대한 추정 기사였다. 귀성 차량은 21일 오전, 귀경 차랑은 22일 오후와 23일 오후에 가장 많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명절에 차를 몰고 어디론가 간 적은 없지만, 사실 누구나 뻔히 예상할 수 있는 내용 아닌가?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검은 날 출근하고 빨간 날 휴식한다는 공통점을 지는 공동체가 아니던가.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지금 생각해보니 나도 8년 전에 직접 차를 몰고 정읍의 큰집에 간 적이 있었다. 평생 잊히지 않을 열 세 시간의 운전! 자정에 도착해서 바로 잠들었다가 다음날까지 피곤에 허우적대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열세 시간 중 여섯 시간은 서울을 빠져나가는 데만 걸린 시간이었다. 그럴 줄 알면서도 그렇게 갈 수밖에.
언젠가 이벤트에 당첨되어 토요일에 동호회원들과 함께 미술관에 간 적이 있었다. 미술관을 가득 매운 아이들과 어머니들은 분명 그림 감상에 큰 지장을 초래했다. 대학생이었던 몇몇 회원들은 평일에 오면 좋을 텐데 하면서 투덜거렸지만 어쩌랴? 나는 대한민국의 직장인인걸. 놀이기구 10분 타기 위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걸 알면서도 놀이공원을 주말에 갈 수 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직장인.
어쩌면 이러한 추석 연휴의 단상들은 방송인에게는 남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24시간 돌아가야 하는 송출 담당자들, 추석 특집 생방송을 담당한 제작자들. 그들은 지난 방송의 날도 바쁘게 지냈던 주역들이었다. (EBS는 어린이날이 가까워오는 날들도 바쁘게 지낸다.) 오랜만에 가족 친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TV는 대화를 저해하는 요소로 지적되지만, 올 해는 가족끼리 모여 전을 부치면서도 땀 흘리는 방송인들의 작품을 더욱 관심 깊게 봐야겠다. 어느 프로그램에서도 크레디트에 내 이름이 나올리는 없겠지만, 농민들의 땀과 추석을 맞아 음식을 준비한 가족들의 정성이 어린 음식을 감사히 먹듯, 나의 동료들의 수고도 감사한 마음으로 감상하려고 한다. 왠지 어느 때보다 풍성한 추석이 될 것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