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편 전성시대가 오나?

[칼럼] 종편 전성시대가 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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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개국한 이래 현 정부의 각종 특혜로 무장하고 화려하게 등장한 종합편성채널. 그러나 9개월이 흐른 지금 종편은 자신들이 가진 짧은 역사와 고난의 시간에 정비례하여 그들 나름대로 ‘사상 초유의 위기’에 직면해있다. 낮은 시청률로 인한 존재감의 미비는 예사일이며 대중의 비판에 정면으로 ‘직면당하는’ ‘저질 콘텐츠 논란’도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꾸준하게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 악몽처럼 그들을 따라다니는 보도 편향성 지적도 더해지고 있으니 종편은 그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소위 ‘가루가 될 정도로’ 까이는 실정이다.

 

   
 

하지만 종편의 진짜 위기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에서 기인한다. 바로 ‘돈’이다. 최근 금융감독원은 전자공시를 통해 종편의 열악한 경영 상태를 지적하며 2012년 상반기 기준 JTBC는 825억 적자, MBN은 181억 적자, 채널A는 191억 적자 등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여기에 노웅래 민주통합당 의원이 9월 26일 발표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종편 광고 보너스율이 평균 518%에 육박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공영을 제외한 대부분 방송사의 주 소득원이 광고임을 감안했을때, 10원받고 50원어치 광고를 해주는 종편의 광고 보너스율은 처참하기까지한 수준이다. 게다가 정부가 종편에 집행한 광고가 케이블 매체의 2배에 육박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조한 실적을 올린 것은 소위 ‘종편 황금특혜’의 결말을 알려주는것 같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종편 개국에 반대하며 올바른 미디어 환경 구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럼 그렇지’라고 짐짓 흐믓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종편 위기설’을 잠시 내려놓고 ‘충실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바로 신문과 방송의 차이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냐고? 사실 종편을 규정하는것 자체가 신문의 방송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특성의 미묘한 온도차를 따져보자는 뜻이다.

 

   
 

보자. 종편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거대 신문사를 모체로 하는 방송사다. 즉 ‘신문의 방송화’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는 대상이 바로 종편인 셈이다. 그런데 언론 및 여론 형성 부분에서 신문과 방송은 원래 기본이 조금 다르다. 신문은 ‘논지’라는 것이 있다. 즉 특정 신념을 가진 단체가 종이와 활자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충분히 전달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기본적인 공정의 잣대가 필요하지만, 어쨋든 그 잣대는 최소한 신문의 영역에서는 흐릿해질 소지가 다분하다. 하지만 방송은 다르다. 방송은 ‘주파수’라는 공공의 자원을 활용한(요즘 방통위는 그렇게 생각 안하는것 같지만) 정보 전달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방송사에게 들이대어지는 공정의 잣대는 신문보다 더 엄격한 편이다.(물론 현 정부들어 이 부분도 많이 흐려졌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신문이 방송의 영역으로 넘어올 때 파열음이 생긴다. 신문사의 논지를 가지는 ‘저 들’이 과연 방송의 공정성을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들이댈 수 있을까? 아니, 그런 노하우나 문화가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반문하며 무턱대고 종편을 반대하기에는 그 의미의 뿌리가 광범위한 편이라 역부족이다. 안타깝게도 종편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도 ‘폭스 TV’라는 아주 대표적인 종편이 있지 않은가. 그래, 그럼 이쯤에서 국내의 종편도 한번 눈 꼭 감고 그 존재의 다양성 차원에서 인정해보자. 그렇게 10개월이 흘렀다. 그리고 종편은 휘청이고 있다.

하지만 이 시점에 이르러 최근, 저조한 시청률 논란과 상관없이 종편은 휘청이면서도 죽지 않는 좀비처럼 눈을 빛내고 있는것 같다. 개국 1년을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수많은 위기에 봉착한 그들이 눈을 빛낸다? 그렇다. 대선 정국이라는 호재가 그들에게 절호의 회생 기회가 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정치적인 동물이며, 동시에 그 욕구를 풀고자 어떻게든 탈출구를 마련하려고 한다. 그래서 정치 및 사회 현안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법이며 언론은 그 과정에서 훌륭한 플랫폼의 역할을 해낸다. 하지만 이러한 경쟁력에 있어서는 방송보다는 신문이 한 수 위다. 자신의 논지를 가지는 신문은 공공성의 엄격한 굴레안에 놓여진 방송보다 더 자유롭고 과감하게 관련 현안을 매혹적으로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여기서 종편의 경쟁력이 생긴다. 이들은 대선 정국이라는 불안정한 시기에 신문의 마인드로 방송을 만들어 가려 한다. 전파를 통해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정치 현안을 다루며 더 재미있고, 더 친근하게 다각적으로 분석을 시도해 ‘더 맛있어 보이는’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엄숙하고 조금 느린 보폭으로 유명한 지상파는 여기에 상대가 되기 어렵다. 이미 ‘몸을 버려버린’ 케이블도 한계가 분명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최소한 ‘정치의 흥미로운 방송화’를 버무려내는 능력으로는 종편이 최고다.

지상파 방송사가 대선 주자들 모아놓고 엄숙한 토론회를 펼칠때, 종편은 대선주자들의 옷 스타일부터 말투, 심지어 지상파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사회자와 토론자의 지능싸움’까지 등장시켜 정치를 엔터테인화 시킨다. 당연히 능숙할 수 밖에 없다. 신문 사업자로서 자신들의 논지를 더욱 아름답게 ‘마사지’를 해온 그들이 아닌가. 그 무대가 신문에서 방송으로 바뀌었을뿐, 달라진 것은 없다. 종편은 그들이 잘 하는 것을 할 뿐이고, 그러한 시도는 대선 정국을 거치며 이슈와 화제를 낳으며 종편 전체의 긍정적인 기폭제가 될 것이 분명하다. 미심쩍으면 미국의 ‘폭스 TV’를 한 번 보라.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는 데다가, 편파도 이런 편파가 없을 정도지만 솔직히 그래서 ‘재미있다’

여기서 전제할 점은, 종편의 이런 정치의 엔터테인화가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확실히 하건데, 종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그들 나름의 신념과 다양성을 위한 믿음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최소한 지금의 미디어 환경에서 종편이라는 존재는 ‘부정’의 의미가 강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의 등장으로 미디어렙 논의가 터져나왔고, 그들의 편파 보도는 그대로이며 콘텐츠 ‘질’의 문제 등은 언제나 논란의 중심이다. 동시에 정치의 엔터테인화는 지나친 흥미 위주의 가십거리를 다룬다는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중간이 적당하겠지만, 솔직히 종편은 너무 멀리갔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있는 전문가들은 종편에 대한 비판을 거두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12월까지 쭉 이어질 대선 정국을 예상해보면, 지금 필자가 보고 있는 종편의 정치 콘텐츠들은 꽤 흥미롭기 때문에 심정이 복잡미묘하다.. 돌발상황이 많고, 정형화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콘텐츠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튼 전체의 형국을 다양한 의미를  포함한 ‘활자’로 표현하는것에 익숙한 신문 기자들의 상상력은 종편에서도 그대로 묻어난다. 그러나 이는 긍정적인 미디어 현상은 아니다.

대비하자. 이는 무조건 종편을 배격하고 처치하자는 과격한 논리가 아니다. 그들의 등장으로 인해 손톱만큼이지만 긍정적인 미디어 변화가 생겼다면 이를 수용하고, 지금 상황에서 까일대로 까인 종편의 ‘그릇된’ 반격을 대비하자는 것이다. 참고로 ‘TV 조선’에서 방영하는 ‘신율의 대선열차’를 한 번 시청해보라.(딱 한 번만 보길 바란다) 꽤 흥미롭고 웃겨서.. 무서워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