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 국장은 건축학 개론의 서연을 닮았다.

[칼럼] 이진숙 국장은 건축학 개론의 서연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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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진숙 MBC 기획홍보국장(직급 부장)의 초고속 승진이 이슈다. 이유가 뭘까. 이 땅의 모든 샐러리맨들의 로망을 이진숙 국장이 손수 보여주어서일까. 아니면 성공신화에 대한 사소한 질투일까. 그도 아니면 절차적 방법이 모두 무시된 부적절한 결과에 따른 ‘잘못된 사례’이기 때문일까. 여기서 의견이 꽤 분분한 편이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못된 사례’에 초점을 맞추는듯 하다. 다른 동기들은 모두 부장에서 부국장으로 올라간 반면 이 국장은 그같은 절차가 생략되고 곧장 부장에서 ‘진짜 국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MBC 파업의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던 그 순간에도 정의를 정조준하던 불의의 ‘입’이 바로 이진숙 국장이었기에 그러한 의혹은 더욱 거세다.

하지만 이러한 사태의 ‘이슈’를 바라보는 필자의 마음은 조금 착찹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씁쓸하다. 뭔가 소중하게 간직했던 ‘어떤 것’을 빼앗겨버린 기분이라고 할까. 그 상대적 박탈감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저며오는 아픔과 닮았다. 맞다. 어쩌면 고등학교 때 매정하게 필자를 저버린 나의 짝사랑. 그 짝사랑이 끝끝내 내가 멋대로 정한 약속시간에 나오지 않았을때의 감정과 같다. 필자는 시끄럽게 울려퍼지던 크리스마스 캐롤송에 귀를 막으며 길바닥에서 엉엉 울었었다.

 

   
 

"바그다드에서 이진숙입니다"

사실 필자에게 이 국장은 이라크 종군기자의 경험으로 강렬하게 남아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 볼품없는 티셔츠를 입고 카메라 앞에서 불타오르는 전쟁의 한 중간을 중계하는 여기자. 그 긴장되고 파르르 떨리던 극한의 경계를 당시의 종군기자는 진실의 마음으로 우리에게 알리고 있었다. ‘보라. 여기에 참혹한 전쟁이 있다’

아마 그때였던것 같다. 이진숙 기자를 모든 ‘기자’의 표본으로 삼고 꿈을 키워오기 시작한 것은. ‘롤 모델’이라는 말이 딱 맞으리라. 필자는 관심있게 이진숙 기자를 지켜보기 시작했고, 이내 [무릎팍 도사] 김미화 씨 편에서 얽힌 재미난 사연과(이 국장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이진숙 국장이 청년들의 우상으로 요즘식으로 ‘토크 콘서트’하는 장면도 세세히 기억했다. 대학때는 이진숙 기자와 관련된 레포트를 쓰기도 했다. 결과는 A플러스였다.

그래서 그런 이유로 2012년. 공정방송을 위한 MBC 파업의 불길이 들불처럼 일어났을때, 결과론적으로 볼 때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지만, 필자는 정의를 위한 파업의 대오 한 중간에 이 국장이 서있는 장면을 상상해버리고 말았다. 특유의 강단있는 목소리와 표정으로 정의와 진실을 위해 몸을 던지는 기자. 목숨을 걸고 단 하나의 신념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하는 기자. 누가 봐도 뻔한 불의에 대항해서 이진숙 ‘기자’는 모든 난관을 해쳐나가고 있었다. 적어도 필자의 상상속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기에 이 국장은 너무 ‘큰 사람’이 되어있었다. 노조보다는 ‘사측’에 가까웠고 들끓는 정의감에 몸을 던지기보다는 견고한 자신들만의 카르텔을 지키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 1인 시위를 하는 사람을 고소하고, 누구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사람’. 글쎄, 누구의 정의가 옳은지는 모르겠다. 아마 이진숙 국장 자신만의 정의도 반드시 있으리라. 그리고 그 정의의 관점에서는 방송사 파업 문제도 분명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으리라. 이해한다. ‘충돌’의 결과를 두고 가타부타 말할수 있지만 내재된 각자의 순수한 동기는 그 누구도 재단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진숙 국장은 건축학개론의 ‘수지’..즉 서연을 닮았다. 외모가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의 대상을 통해 타인에게 자신을 투영하는 방법이 꼭 닮아있다. 더 쉽게 말하면 첫사랑과 비슷하다고 할까. 서연이 승민의 마음을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아프게 했던 만큼, 이 국장도 자신의 행동과 말이 그를 믿던 대중의 마음을 아프게 할 생각만으로 부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승민은 상처받았고, 대중도 상처받았다. 물론 필자도.

이해하려고 해도 안타까운 것은 아마 첫사랑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 국장이 김재철 사장과 MBC 사측의 입장을 대변하며 많은 이들의 열망을 짖밟은것도 그만의 정제된 정의가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는 말은 하지 말아라. 필자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이리라.

냉정하게 현실로 돌아와야겠다. 이제 8월이다. MBC 방문진은 어느정도 그 위용을 갖추었으며, 김재우 이사장 외 2인은 연임되었고, 나머지 3인 여권 인사 추천으로 6:3의 구조도 그대로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앞으로의 사태도 심상치않다. 노조는 ‘잠정 중단’의 ‘잠정’이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며 이진숙 국장은 초고속 승진도 했다. 심지어 여당 인사들과 접촉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소문도 들린다.

바로 이때, 이 국장이 다시 서울 정릉의 버려진 ‘예쁜 집’에 돌아와주길 바란다면 너무 큰 욕심일까? 서연의 손에 의해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 시간처럼. 이 국장이 공정과 정의의 힘을 여전히 믿어주기를 바란다면 너무 큰 바램일까? 어차피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버린 이 국장, 아니 이 기자일까?

그러나 마지막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 더욱 냉정하고 잔인하다. 여기에는 어떠한 이견의 여지도 없어보인다. 8월, 냉정한 싸움의 게임을 지켜보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이 국장의 면면을 살펴보아야 겠다. 그는 너무 ‘큰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큰 사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