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 편익’의 마술

[분석] ‘시청자 편익’의 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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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후한 말, 삼국지의 주인공 중 하나인 위무제 조조는 이미 유명무실한 황제를 전격적으로 받아들였다. 원소와 손견 등 각지에서 할거하는 군웅들이 땅에 떨어진 황제의 위신을 무시하고 각자의 영지를 넓히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때, 조조는 황제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며 늑대같은 무리들로부터 꾸준히 지켜낸 것이다. 하지만 ‘간웅’이라 불리던 조조가 단순히 황제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로 이러한 행동을 했을까? 이에 대해 많은 역사학자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한다. “조조는 황제를 원한것이 아니라 대의명분을 원한것이다”고.

최근 방송기술 업계를 가만히 살펴보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특히 이경재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의 입에서 나오는 말인데, 바로 “시청자 편익에 따라 결정하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시청자 편익’은 지상파 MMS를 논할때도, 700MHz 대역 주파수 할당을 결정할때도, UHDTV 활용방안을 결정할때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심지어 미래창조과학부도 논란이 되고 있는 유료방송의 8VSB 허용에 대해 “시청자 편익에 따라 결정하겠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이정도면 방송관련 정책을 입안하는 정부부처의 유행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하지만 정부부처의 이러한 ‘시청자 편익’ 발언은 실로 위험하고 치명적이다. 물론 정부부처의 입장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국민, 즉 시청자의 편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겠다는 말이 잘못된 말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이 시청자 편익이라는 단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왜곡해 종국에는 정치적으로, 더 나아가 특정 진영의 특혜를 주기 위한 편리한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쉬운 예로 지상파 MMS를 보자. 현재 지상파 MMS에 대해 지난 5월 이경재 방통위원장은 한국방송협회 임원진과 만나 “현실화 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후 그에 따른 후속조치는 없다. 그저 ‘시청자 편익’을 고려한다는 말만 되풀이 하며 지지부진할 뿐이다. 물론 지상파 MMS에 대한 냉정한 가치판단이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그래도 여론의 편향성을 배제한 플랫폼 사업자로서의 지상파 방송사는 무료 보편의 서비스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던가. OECD 국가 중에서 시청자에게 무료로 다양한 지상파 채널을 제공하지 않는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다는 점을 굳이 상기하지 않아도, 지상파 MMS는 정부부처가 말하는 시청자 편익에 가장 가까운 기술 플랫폼이다. 그런데 이 위원장은 기준도 모호한 시청자 편익을 운운하며 지상파 MMS 도입에 적극적인 리액션을 취하지 않고 있다.

700MHz 대역 주파수 할당 문제도 있다. 현재 해당 주파수는 정부부처의 엉터리 주파수 정책 덕분에 방송과 통신의 끝 모를 싸움에 소모되는 실정이다. 그런데 현존하는 모든 가용 주파수를 통신에 몰아주고도 통신비 인하 등은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하는 미래부는 난시청 해소 및 뉴미디어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해당 주파수의 통신 할당만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방통위는 어떤가. 역시 ‘시청자 편익’에 의해 결정하겠다는 말 뿐이다.

물론 이런 분위기는 UHDTV에도 이어진다. 최근 이경재 위원장은 미국을 방문해 UHDTV에 있어서는 별다른 성공전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FCC의 상임위원을 만나 면담을 진행한 후 기자들과 만나 “UHDTV 국내 도입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 폭탄 발언을 했다. 물론 이유는 “콘텐츠 제작 능력이 부족하고, 시청자 편익에 부합되는지 판단해야 한다”에 있었다. 여기에도 시청자 편익이 나온 것이다. 도대체 방통위원장이 생각하는 시청자 편익이 뭐기에 지상파 UHDTV 2차 실험방송이 한창인 지금 이런 발언이 나오는 것인가. 많은 관계자들이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심지어 특혜논란이 일고있는 유료방송의 8VSB 허용에 있어서도 시청자 편익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최근 미래부는 종편 비밀 담합 TF 여파로 한차례 곤혹을 치른 유료방송의 8VSB 허용을 전제로 하는 연구반을 가동하고 있다. 동시에 사회 각계각층에서 유료방송의 8VSB 허용은 종편특혜의 연장선상이라고 비판하자 미래부는 ‘시청자 편익’에 맞춰서 고려하겠다는 발언만 되풀이 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로 되돌아 볼 때 미래부와 방통위가 생각하는 시청자 편익은 별로 진정성 있게 들리지 않는다. 그저 다양한 방송현안에 있어 자신들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준을 시청자 편익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로 꾸민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시청자 편익을 고려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은 극히 미약해 보일뿐더러 그 기준도 상당히 모호하다. 지금이라도 정부부처는 시청자 편익이라는 자의적이고 모호한 기준으로 방송현안을 외면하지 말고, 보다 구체적이고 냉정한 현상접근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창조경제에 방점을 찍은 유료방송 육성안에만 매달리지 말고 무료 보편의 플랫폼 사업자인 지상파 방송사의 의견에도 충분히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포인트다.

후한 말 조조는 황제를 등에 업고 각지의 군웅들에게 멋대로 명령을 내렸다. 중화사상에서는 하늘에서 황제가 나오고, 황제로부터 ‘대의’가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조는 황제를 보필함으로서 황제의 대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고, 그 대의라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다. 그만큼 흐릿하고 거대한 단어는 묘한 마법을 지니는 법이다. 이제 우리는 ‘시청자 편익’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때가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