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독서와 사랑에 빠지다

[문화] 늦가을, 독서와 사랑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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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아니, 조금은 늦은 감이 있는것 같다. 지금은 늦가을이나 초겨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맞다. 이제 차분하게 내려앉은 햇살 사이로 애틋하게 솟아오르는 차가운 하늘의 숨결이 조금씩 익숙해지는 계절이 왔다. 지금은 늦가을, 책을 읽기 좋은 날이다. 지금은 도시와 사람을 깨우는 차가운 가을비가 모두를 적시는 계절이다. 동시에 천만독자를 자랑하는 공지영 작가의 ‘사랑학 개론’이 책 읽은 사람들의 서재에서 하나, 둘 발견되고 있다. 굳이 ‘사랑학 개론’이라는 단어를 붙힌 이유는 간단하다. ‘사랑은 서로를 허락하는 것’이기에,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로 정의할 수 있으니까.

 

공지영 작가가 낸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는 늦가을 독서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선물이 될만한 책이다. 공지영 작가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함의를 차치하더라도, 차가워지는 계절에 한 줄기 빛이 될 만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은…

공지영 작가는 25년 문학인생에서 드러나듯이 한 결 같은 이 시대의 ‘글쟁이’다. 그러나 그녀의 글에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충만한 사랑이 함께하기도 하지만, 역으로 너무나 냉정하고 차가운 시니컬함이 공존하고 있기에 더욱 새롭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앤솔로지’로 명명된 그녀의 글 귀 하나하나에는 따사로움과 섬뜩함이 동시에 공존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그녀의 이러한 창작세계는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유는 명쾌하다. 이 책에는 그녀 25년 문학인생에서 소중히 길어 올린 글귀들이 모여있기 때문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값진 보물이 아닐까. 또한 그녀가 ‘도가니’와 ‘의자놀이’를 집필하던 서재와 함께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한 오래된 흑백 사진, 또 어쩌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믿음에 대한 성모마리아와 예수의 초상, 그리고 아이들을 담은 풍경이 23컷의 사진에 담겨있다. 방대하게 펼쳐진 한 여류 작가의 치열한 고민의 사유와, 그 흔적의 기억들을 함께 더듬어 보는 것도 커다란 매력이라고 하겠다.

 

 

조금은 시니컬한 사랑

하지만 공지영 작가의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에 마냥 풍성하고 넘쳐흐르는 햇살만 가득할 것이라는 편견은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여기에는 ‘사랑이 과연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만 만들어 주는 것일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숨어있다고 하겠다. 물론 공지영 작가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꽤 시니컬한 중얼거림을 책에 담아냈다. 오로지 자신을 사랑하며, 그 너머의 모든 존재를 사유하라는 불가의 규율과 그녀의 정신세계가 닮아있다고 느끼는 것은 과도한 오지랖일까. 물론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최소한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 아니다]에 담긴 그녀의 사랑학 개론은 꽤나 자기 중심적이며 동시에 헛웃음이 나올 정도의 가벼움을 담고 있다. 조금은 시니컬한 사랑.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인정받고 허락받는 사랑을 그려냈다고 볼 수 있다. 떨어지는 낙엽에 슬퍼하기 보다는 직접 앙상한 나무로 다가가 무너지는 시간을 부여잡겠다는 공지영 작가의 독백은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의 문학적 가치를 더욱 빛나게 만들고 있다.

 

 

깊어가는 가을, 겨울을 기다리다

흙냄새가 물씬 풍기는 토속적인 소설부터 사회를 날카롭게 해부하는 르포까지. 공지영 작가의 필력은 상당히 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편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극단의 두 분야에서 시대의 지식인이자 교양인으로서, 굳어버린 문자가 선사하는 고정의 아름다움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를 즐긴다. 현대 사회의 올바른 책무를 스스로 실천하고 있지만 잘못된 사회적 관념으로 인해 다수의 비판을 받는 작가. 하지만 자신의 뜻을 쾌활하게 펼치고 이것저것 재단하는 것을 피하는 발랄한 여류 작가. 공지영 작가의 구김살 많지만, 역으로 구김살 없는 사랑에 대한 독백은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에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독자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밝은 언덕에 서서 명랑한 표정으로 풍성한 사랑을 노래하기 보다는, 어두운 호수의 밑바닥에서 산란하는 햇빛을 향해 손을 뻗는듯한 작가의 이야기에 선뜻 감정이입이 어렵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세상은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라고 가르치지만, 공지영 작가는 ‘어둠에서 인정하고 사랑에 상처입어라’라고 체념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25년 문학인생을 살아온 여류작가의 신념 아닌 신념이 아닐까.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 공지영 앤솔로지

페이지 408 폴라북스 / 정가 14,000원

 

02 사랑은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다 그래도 당신은 내게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군요. 그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라고,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다만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이 사랑이라고, 제게는 어려운 그 말들을 하시고야 마는군요. 그래요, 그러겠습니다.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사랑을 말입니다.-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