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주호(EBS 기술연구소)
대학교 2학년 때 필수 과목이었던 제2 외국어로 독일어를 수강했던 적이 있었다. 10년도 더 지난 지금도 1학기 중간고사를 보던 때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강당에 널찍이 떨어져 앉아 조용히 시험을 치르는 중에 시험 감독을 맡은 한 조교가 내 옆에 바싹 붙어 답안을 작성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던 것이다.
‘왜 내 옆에 왔지? 내가 이상한 답을 썼나?’
그 조교는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다른 곳에 있던 조교들을 손짓으로 불러 모으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금세 내 주위를 포위했다. 내가 부정행위를 의심할 만한 행동을 해서 다른 조교들에게 나의 혐의를 확인시키려는 것일까? 불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나와 눈이 마주친 조교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글씨를 참 특이하게 쓰시네요.”
요즘 아이들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왼손잡이. 이제 갓 낳은 아이를 제외한 네 명의 조카들 중에 두 명이 왼손잡이라는 사실에 놀란다면 세상 물정 잘 모르는 구시대 인물이라고 놀려도 괜찮을까? 어쨌든 불과 10 수년 전만 해도 공책을 시계 방향 90도로 돌려서 쓰는 왼손잡이가 진기명기로 보이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20년 전에는 왼손잡이는 반드시 고쳐야 하는 장애 혹은 사회악으로 취급되었다. (표현이 좀 과격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당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 지금도 초등학교 2학년 때가 기억난다. 억지로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힘들었던 나는 선생님이 학생들을 등지고 칠판에 필기 내용을 쓰는 사이 연필을 왼손으로 바꿔 들었다. 이에 놓칠 새라 옆에 앉은 짝이 바로 선생님에게 일러바친다.
“선생님, 얘 또 왼손으로 써요!”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제시간 내에 공책에 옮겨 쓰는 것이 중요하지 왼손 오른손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리고 그 짝은 내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파파라치처럼 일러바쳤던 것일까?
“또 혼나고 싶은가보지?”
이것이 선생님의 짧은 답변이었다. 지금은 이 한 사건만 기억나지만 6년간의 초등학교 에 대한 기억이 대체적으로 부정적이었던 것은 이러한 수모를 꾸준히 당해왔기 때문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은 왼손잡이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다. 왼손잡이 조카들은 그들의 부모나 심지어 왼손으로 펜을 잡을 때마다 나무라셨던 나의 부모님, 그러니까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어떤 야단을 들은 적이 없다. 왼손 오른손의 구분이 학교 선생님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인 것 같다. 아니, 오히려 왼손잡이는 머리가 좋고 똑똑하다고, 그리고 감수성이 탁월하다고 하면서 (우리 집에서는 나를 그 한 예로 말하곤 하지만) 암암리에 장려하기도 한다. 왼손으로 글씨를 쓰려고 노력하다가 포기한, 혹시 오른손잡이들 중에 이러한 경험을 갖고 계신 분이 있으시지는 않은지?
요즘 들어 ‘왼쪽’이라는 단어가 자주 눈에 띈다. 그런데 그 ‘왼쪽’이라는 의미에 매우 부정적인 의미가 실려 있음도 본다. 왼손으로 글씨를 써도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 오히려 환영을 받는 시대가 되었지만 아직 ‘사고의 왼손잡이’에 대한 인식은 아직 과거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오히려 왼손잡이들을 장애아로 취급하고 오른손잡이로 바꾸려고 했던 그들이 그 올무가 걷어지지 않게 꼭 붙잡고 있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 사람들이 그 올무를 던진 바로 그 사람들이 아닌가? 왼손잡이들에게 진정한 자유가 오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말콤 X’라는 꽤 긴 영화가 있다. 흥행은 못했지만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기에 기억하고 계신 분들도 많을 것이다. 이 영화는 미국의 평범한 흑인 청년이었던 말콤 래틀이 흑인의 인권에 눈을 뜨면서 ‘래틀’이라는 백인의 성을 버리고 알 수 없다는 의미로서 ‘X’라고 고친 후 흑인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던 중 암살당한 실존 인물이 삶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에서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교도소에 있던 말콤 X가 함께 수감되어있던 동료 흑인에게 사전에서 ‘black’이라는 단어를 보여주며 그 의미를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black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로 가득하지. 이러한 관념을 누가 만들었을까? 백인들인 거야. 우리는 이것을 바꿔야 해.”
‘왼쪽’ 혹은 ‘left’이라는 단어에는 사전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들만의’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모든 하늘을 나는 것들은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가 사라지면 바로 추락하게 된다는 사실(여기서 뜬금없이 로케트를 언급하지는 말자)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추락하지 않고 살아남는 길이다.
“혼나고 싶은가보지?”
요즘 뉴스를 보면 그 때의 그 말이 자꾸만 기억이 난다. 내 뇌리에서 이 잔소리가 사라질 그 때가 아득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