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임’ 그리고 ‘날조’에 의한 명예훼손
‘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이 역사에 출현하는 과정이 그리 자연스럽거나 낭만적이지 않았음을 경제사에서는 ‘시초축적’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생산자를 생산수단과 분리시켜 임금 노동자를 만들기 위한 이 과정에서 국가권력의 노골적인 폭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는 것이다. 혹자는 ‘피’와 ‘오물’을 쏟으며 자본주의는 태어났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에 빗대면, 현재 우리는 다공영-일민영 시스템을 일국영(또는 일관영)-다민영 시스템으로 바꾸기 위한 현 정권의 시초축적, 시초폭력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 두 개의 혐의와 이에 수반된 폭력이 동원되고 있다. 그 하나가 정연주 KBS ‘사장’에 대한 배임 혐의였고, 이에 기초해 정 사장 해임으로 이어진 행정 쿠데타였다. 행정 쿠데타는 성공했고, KBS는 관영화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그 물적 기반을 강화하는 한편 특혜의 특혜를 받을 게 분명한 종합편성채널의 광고재원을 확보해 주는 차원에서 수신료 인상이 거론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 감사원, 검찰이 총동원돼 정 사장에게 씌운 혐의는 ‘배임’이었다. KBS가 내야 할 법인세와 부가가치세를 산정하는 방법과 관련해 국세청과 기한을 알 수 없는 조세소송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서을고등법원이 마련한 ‘KBS의 법인세 및 부가가치세 환급 조정권고안’을 정 전 사장이 수용해 KBS에 심각한 손해를 끼쳤으며, 자신이 연임할 목적으로 법원의 이 조정권고안을 수용했다는 게 검찰의 주장이었다.
서울중앙지법은 KBS에 손해를 끼쳤다고 단정할 수도 없고, 연임을 목적으로 법원의 조정권고안을 수용한 것도 아니라고 판결했다. 두 사안과 관련된 10가지 쟁점과 관련된 검찰의 기소 내용을 자세히 반박한 법원의 판결문에는 검찰의 기소 자체를 조롱하는 듯 한 문구마저 포함돼 있다. “(법인세 및 부가가치세 환금 조정권고안을 수용하는 것에 따른) KBS의 유․불리는 최종 사법판단 이전에는 선뜻 판단할 수 없는 사안이고, 조정이라는 것 자체가 이러한 유․불리를 법원의 판단 하에 합의에 따라 종결시키는 것인 바, 특히 법원이 조정안을 승인하고 권고안을 내어 상대방이 응하는 형태라면 어느 일방에 배임의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사법 작용의 속성에 비추어 어렵다고 보며, 재판부의 방조 책임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법원 조정안을 정 사장이 수용한 게 배임이면, 법원이 배임을 방조한 것이냐는 힐난인 셈이다.
현 정권이 벌이는 시초축적 과정에 동원되는 혐의는 <피디수첩>이 미국산 소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을 보도하며 조작․날조를 통해 현 정권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이는 MBC에 대해 집요한 공격을 하는 이유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데, 방송문화진흥회를 장악한 한나라당 추천 이사들이 엄기영 사장의 해임하기 위해 내세우는 명분도 바로 이것이다.
김우룡 방문진 이사장의 말을 종합하면, ‘MBC 사장 임기 보장이 원칙이지만 경영 실패에 대해선 방문진이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경영 실패’의 내용이 무엇이냐는 건데, MBC야 많지는 않지만 흑자를 기록해 오는 등 수치를 가지고 꼬투리를 잡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찾아내 동원하는 논리가 ‘프로그램의 편성도 경영에 포함된다’는 것이고, 이 기준에서 조작․날조된 프로그램에 대한 관리․감독을 소홀히한 책임을 물어 엄 사장을 해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경영권의 핵심에 인사권과 편성권이 있는데, MBC노조가 이를 침해해 왔다는 공세도 펴고 있다.
방문진이 엄 사장 해임을 위해 동원하고 있는 폭력의 근저에는 그동안 방송법에 따라 보장돼온 제작자들의 ‘편성의 자율성’에 대한 부정이 자리한다.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 보도 과정에서 빚어진 <피디수첩>의 실수가 ‘날조’와 ‘조작’을 하려는 실제적 악의(actual malice)를 가지고 이뤄졌다는 확정되지 않은 ‘부당전제’는 그 연결고리로 구실한다. 실수인지, 조작과 날조인지는 사법부의 판결 이전에 전제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실수라고 해도 사회적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이런 차원에서 극심한 사내외 반발에도 불구하고, 엄 사장은 시청자 사과를 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나라당 추천 이사들은 ‘경영의 일부를 이루는 편성에 대한 경영진의 관리․감독’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편성이 경영과 무관할 수 없음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제작자는 물론 경영진까지 포함해 해마다 편성전략을 짜고 수정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편성도 경영의 일부이니 경영을 책임지는 사장이 편성 과정에 깊숙이 개입해야 한다는 식으로, ‘태평양’을 건너뛰진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방송법은 편집 자율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지금은, 결코 부러지지 않는 유연함으로 흑색 ‘정치공세’에 대응하는 현명함이 MBC 노사 모두에 필요한 때이다. 부러져버리면 언론계 전체에 주는 그 후과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공공미디어연구소 소장 조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