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중재법 강행 처리를 당장 멈춰라

[사설] 언론중재법 강행 처리를 당장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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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기술저널=변철호 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장] 8월 국회 본회의 상정을 목표로 더불어민주당이 밀어붙였던 언론중재법은 야당의 반대와 불리해진 여론에 밀려, 여야 합의로 8인 체제를 구성해 논의하고 9월 27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될 예정이다. 실효적 피해 구제와 언론·표현의 자유 사이에서 언론과 정치권에 많은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번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핵심은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이다. 고의나 중대한 과실로 인한 허위·조작 보도로 손해를 입었다고 판단되면, 손해액의 최대 5배까지 배상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징벌적 손해배상제까지 도입하는 법안이 나왔는지 대한민국 언론은 사회적 책임과 시민의 비판을 엄중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인터넷 포털의 조회 수를 늘리려는 자극적인 기사, 사주의 이익을 위해 침묵하고 사실을 왜곡한 기사, 정치 양극화를 부추긴 정파적 기사 등으로 국민의 신뢰를 저버린 언론 자신이 먼저 성찰하고 자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의 초반인 5월 민주당이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는 국민의 80%가 찬성했지만, 8월 발표에서는 찬성이 54%로 떨어졌고, 급기야 9월 SBS 여론조사에서는 찬성 42%, 반대 46%로 역전됐다. 야당과 언론·시민단체들은 물론이고, 외신과 유엔, 인권위원회까지 이번 개정안에 반대하고 나섰다. 법안의 취지에는 공감하나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독소 조항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번 언론중재법은 법률적으로 명확성,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된다. 기본법을 제한하고 게다가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법률을 만들 때는 법 조항을 다의적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명확하게 규정해야 한다. 어떤 것이 허위·조작 보도에 해당하는지 그 요건들이 명시돼 있지 않고, 보복적 허위·조작 보도의 구체적 예가 없으며, 언론의 고의 중과실 역시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에 맡겨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실수와 고의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 일부 잘못된 사실을 허위보도로 간주해 버릴 위험은 없는가? 그 때문에 명백한 증거가 부족한 단계에서 신속히 진행돼야 하는 초기 의혹 보도는 당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정치 성향이 다른 비판적 보도, 부패 비리 범죄를 폭로하는 탐사 보도가 크게 위축될 위험성이 있다.

이런 고의 중과실 추정의 모호한 규정 때문에 비판적인 언론을 대상으로 무조건 소송을 걸고 보는 전략적 봉쇄소송이 남발할 가능성이 있다. 대기업이나 국가 공공기관 및 지자체는 얼마든지 비판적 기사에 대응하기 위해 예산을 쓸 수 있지만, 제소를 당한 언론사의 기자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다. 특히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도입되면 진실 여부를 떠나 보도 과정에 일어나는 실수 또는 취재원의 노출, 변심 등으로 언론사가 막대한 부담을 질 수 있다. 이런 위험이 커지면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언론으로서는 합리적 의혹 제기조차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민주당 송영길 대표도 언론의 고의 중과실 추정 조항은 삭제하겠다면서 한발 물러선 상황이다.

또한, 이번 개정안은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된다. 이미 헌법, 민법, 형법, 정보통신망법 등에 타인의 명예 등 인격권을 침해했을 때 피해를 구제하고 가해자를 제재하는 법안이 여럿 존재한다.

헌법 21조 4항, 민법 764조, 형법 307조 사실적시 명예훼손 2년 이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 벌금,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5년 이하 징역, 10년 이하 자격정지 또는 1천만 원 이하 벌금, 309조에서 타인 비방 목적 명예훼손 가중 처벌, 정보통신망법 70조 사실적시 명예훼손 3년 이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 벌금, 거짓의 사실 명예를 훼손하면 7년 이하 징역, 10년 이하 자격정지 또는 5천만 원 이하 벌금.

만약 기존 법률로 언론의 불법 행위를 충분히 제한, 처벌할 수 있다면 추가적인 규제 입법은 과잉금지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언론 전담 판사들도 그동안 인격권 침해에 대한 손해 인정액이 너무나 낮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동안 인터넷 뉴스 플랫폼뿐만 아니라 소규모 언론사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고, 철저한 사실 확인 과정 없이 기사를 베껴 쓰는 문화가 만연한 탓에 500만 원 이하의 판결이 많았던 측면도 있다. 또한, 산술적 산정이 어려운 인격권 침해에 대한 피해 보상액을 얼마로 판결할 것인가는 오로지 판사의 경험과 재량에 달린 것이다.

언론사의 악의적 보도와 기초적인 사실 확인조차 게을리한 기자에 의해 선량한 시민이 피해를 보았다면 당연히 구제받아 마땅하며 그 피해에 맞게 보상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 개정안에는 언론사 매출액에 따라 손해배상액이 달라지게 돼 있다. 허위보도가 남발되는 유튜브 등 1인 미디어는 오히려 이 법안에서 빠졌고, 매출이 적은 언론사는 얼마든지 가짜뉴스를 양산하고 마음껏 인용해도 배상액이 적게 산정되도록 설계돼 있어 시민의 피해를 구제하겠다는 입법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미국 기자협회 큐비스케 공동의장은 이 법이 기자들의 자기 검열을 더 강하게 만들고, 전 세계적으로 언론 자유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우려했다. 유엔 이레네 칸 의사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도 이 법안 내용에 추가적인 수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정보와 언론·표현의 자유라는 권리를 심각히 제한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당국에 과도한 재량을 부여해 독단적 이행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려했다. 이에 더해 언론인들이 고의 중과실 추정을 반박하기 위해 취재원을 밝히라는 강요를 받을 수 있으며 이는 언론 자유에 중대한 위협이 된다고 지적했다.

언론의 자유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이번 언론중재법의 대안으로 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를 포함한 언론현업 5개 단체는 신문과 방송, 인터넷뉴스서비스 사업자와 IP 사업자, 언론계, 법조계, 언론시민 단체들이 추천하는 위원으로 구성된 ‘저널리즘 윤리위원회(가칭)’를 제안했다. 이를 통해 그동안 실효성 없이 겉돌았던 미디어 시장 전반의 자정 기능을 제대로 작동케 하고, 저널리즘의 옥석을 가려내 시민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전환점을 마련하길 기대하고 있다. 여기서 도출된 합의안으로 언론 윤리를 저버린 언론사에 대해 포털과의 제휴에 일정한 제약을 받게 한다든지, 여러 기금으로부터의 지원을 못 하게 하는 정도의 강제력을 충분히 가진다면 언론 생산자와 소비자가 모두 공감하고 내실 있는 자율 규제가 가능하다고 판단한다.

바닥까지 추락한 한국 언론이 신뢰를 되찾는 길은 여당이 밀어붙이는 언론재갈법이 아니라, 언론계 자체의 반성과 자율규제를 통한 대국민 신뢰 강화가 우선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