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혼은 끝나지 않았다

[사회 문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혼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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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가 점령당했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월스트리트 한복판에 텐트를 치고 노숙할 때만 해도 아무도 이들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1%에 맞선 99%의 투쟁, 점거하라’는 슬로건을 앞세운 이 젊은이들이 노숙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주장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이 운동은 미국 전역과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국가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빈부격차와 실업이 공통의 화두로 떠오른 이 전 지구적 운동은 ‘성장 위주의 자본주의’라는 기존 체제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1%대 99%’. 20대 80으로 상징화되어 있었던 사회가 1대 99의 사회로 전락했다. 그리고 99%의 생존권은 더 이상 보장되지 않고 있다. 99%들은 금융위기의 핵심에서 세계경제를 어려움에 몰아놓고는 구제금융으로 살아나 보너스 잔치를 벌인 금융권에 분노하고 있다. 이 분노는 사회 1%에 대한 분노로, 그리고 자신들의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현재 미국의 청년 실업률은 전체 실업률 9%의 2배인 약 18%다. 10명 중 2명이 직장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결과적으로 성장 위주의 기존 자본주의 시스템이 최종적으로 중상층을 몰락시키면서 빈곤층을 확대시킨 것이다.

물은 아래로 흐르지 않았다. 기본 시스템은 부의 분배에 앞서 부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이의 절대적인 크기가 더 커지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몫도 더 커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상류층의 부는 아래로 흘러내리지 않고 위에만 고여 있었다. 오히려 강력한 복지 시스템을 갖춘 국가, 예를 들면 스웨덴?핀란드와 같은 북유럽 국가의 상류층 부가 중산층, 빈곤층으로 흘러내는 것이 훨씬 쉬웠다. 세금과 소득 이전 정책이라는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물이 밑으로 내려오기 위해서는 복지 국가라는 전기펌프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번 운동에서 주목할 점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조직화된 단체나 지도자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바로 99%의 의견을 있는 그대로 수렴할만한 정당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셜 네트워크로 연결된 시위대는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 스스로 토론을 하고, 운동을 조직하고, 참여를 독려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내세우는 메시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것은 정당으로 대변되는 기존 대의민주주의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국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기존 정치에 한계를 느낀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최근 기존 정당체제를 비판한 안철수 교수에 대한 폭발적 지지현상과도 맥을 같이 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혼은 끝났다.” 이 때문에 슬라보예 지첵과 같은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내놓으며 큰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시대에 맞게 스스로의 모습을 고칠 수 있는 자기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 1930년대 대공황 때도 케인스식으로 극복했고, 1980년 인플레이션 때도 대처와 레이건식으로 극복했다. 아마 이번에도 복지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가 시대에 맞게 모습을 고치는 동안, 대의 민주주의도 정당정치의 한계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와 발전을 갈망하는 99%들에게 새로운 해답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